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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speakable Groaning

#6 성령의 말할 수 없는 탄식 : 캄보디아 에서의 선교 경험 (1997-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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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빠일른

 

≪빠일른(Pailin≫

 

빠일른에서는 어른도 아이도

남자도 여자도 개울가에서

웅덩이에서 온종일 빨래를 한다.

 

몸의 반은 물에 담그고

윗몸은 따가운 햇살을 받으며

흙을 비비고, 또 비비고, 물에 씻고

씻은 빨래를 자세히 드려다 본다.

 

붉은 노을이 탈 때까지

반짝이는 큰 조각을 찾을 때까지

한번 행운을 잡을 때까지

끊임없이 빨래를 한다.

 

이윽고 별들이 반짝인다.

적막한 산 위에서

피곤한 육체들의 지붕 위에서

그 개울가 그 웅덩이 위에서

그리고 그 허망스럽디 순진한

이 사람들의 꿈보다도 더 높은 곳에서

무수한 별들이
그들의 보석이 되어 빛난다
빠일의 별들은
이 도시 위에서 유난히 반짝인다

 

 

빠일른은 킬링필드의 주범들인 크메르 루즈의 마지막 요새였다. 빠일른 도시의 땅 밑에는 많은 보석들이 묻혀있다. 그래서 특히 비가 온 뒤에는 큰 보석들이 눈에 띌 때가 있다고 한다. 빠일른에서는 하늘을 보지 말고 땅을 보며 걸으라는 말이 있다. 이 보석들을 팔아 태국으로부터 무기를 사서 크메르 루즈는 오랫동안 정부군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벌이다 결국 1999 년 쯤 폴폿이 사망하면서 정부군과 싸우지 않기로 하고 정부군으로 편입된다. 일당백의 전투력을 갖춘 크메르루즈 군인들은 1975-1979 년 사이에 자국민을 150 만 정도 죽였다. 2000 년도 1월 지미 림 선교사에서 연락이 왔다. 이제 빠일른이 열렸으니, 그리고 그곳 주지사가 요청하니 그곳을 한번 방문하자고 했다. 우리는 그곳이 어떤 곳인지 궁금했다. 캄보디아인들도 무서워서 방문하지 못하는 곳이었다. 아이들 둘과 집사람. 그리고 부곡교회 자매들 몇 명, 신학생 몇 명이서 밴을 타고 프놈펜으로 가 Jimmy Rim 팀과 합류했다. 우리쪽 봉고 한 대, 그 쪽 봉고 한 대 이렇게 해서 출발했다. 바땀방까지 9 시간 정도 걸렸다. 그곳에서 빠일른까지 5 시간을 달렸다. 그러니까 우리 깜뽕솜에서 시작해서 총 18 시간을 그 엉망인 길을 달렸다. 그때는 밤에는 총기를 든 강도들이 차를 세우고 도적질 하는 때다. 우리 두 대의 봉고는 항상 같이 붙어서 드라이브 했다. 그것은 모험이었다. 지미 림 선교사님은 그 때 중풍이 와서 한쪽 손과 발이 부자연스러웠지만, 한 손으로 계속 차를 몰았다. 마침내 빠일른 초입에 들어서자 길 한편에 탱크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군부대였다. 그 곳에서 내려 그 부대 안으로 들어가 탱크에 올라가 사진을 찍고 군인들과 이야기하고 왔는데 그들이 크메르 루즈 군인들이고 지휘관들만 정부에서 파견한 사람들이라고 했다. 그 도시로 들어가는 길 옆에 단위에는 해골을 올려져 있었다.

우리 팀들이 도착하자 벌써 빠일른 학교의 전교생들이 도열해 있었고 문교부 관계자. 그리고 주지사가 우리를 반겼다. 그리고는 우리에게 부탁했다. 전쟁을 오랫동안 하느라 학생들이 전혀 교육을 받지 못했고 정부에서도 지금 지원이 없으니 기독교에서 와서 무엇을 해도 좋으니 자기네 어린아이들 교육을 시켜 달라고 했다. 참 감동스러운 일이었다. 살인자들과 그들의 가족이 모여 사는 곳. 외부로부터 버림 받은 곳. 그들은 이러한 죄 의식 속에 평생을 살아가야 했을 것이다. 이것이 성령님의 탄식하심이었구나 생각되었다. 그들도 구원받아야 했고 아무도 무서워서 오지 않는 곳. 이 지혜로운 주지사는 기독교에 손을 내민 것이었고 폭 넓은 관계를 가지고 있었던 Jimmy Rim 선교사님은 몸이 불편한 가운데도 이곳까지 오게 된 것이 그 속에 있는 성령님이 강권하셨겠구나 생각되었고, 또한 우리도 모두 연약한 아이들, 자매들이 대부분인데 그 위험한 길을 어떻게 모두 동의해서 오게 되었을까. 성령님의 말할 수 없는 탄식하심이 아니었으면 올 수 없는 일이었다. 

 

빠일런을 다녀오고 나서 나는 회의에 빠졌다. 그곳은 분명 누군가 도와 주어야 하는 곳이다. 시급히 가야 하는 곳이다. 그러나 우리 깜뽕솜에서는 갈 수 있는 거리가 아니다. 쉬지 않고 달려도 18시간. 아무래도 다른 사람이 가야 한다. 나는 의도적으로 그곳에서 보았던 것과 마음의 부담을 잊어 버리려 했고 그저 기도만 할 뿐이었다. 그것을 생각하면 할수록 너무나 분명한 부르심이었기에 그러나 그 부르심에 응할 수 없는 환경이었기에 나는 잊으려고 애썼다. 나는 그들을 잊을 수 있어도 성령님은 어찌 그들을 잊을 수 있을까. 모든 저주와 질시와 증오를 한 몸에 받고 살아가는 그들. 또 무고한 그들의 자녀들. 이들에게는 교육보다도 복된 소식. 구원의 소식이 절실한 데 누가 그 곳에 갈 것인가. 하루하루 성령님은 학수고대 하셨을 것이다. 그 해 5월이 되었다. 학생 중 한 명이 결혼을 하게 되었다. 결혼을 하면 우리 선교관에서 같이 지낼 수 없고 따로 나가서 방을 얻어 생활해야 한다. 그 때는 한 20명 넘는 신학생들이 선교관에서 같이 살면서 성경공부를 했다. 그 친구는 고민에 빠졌다. 나가서 방 얻을 형편은 못 되었고 결혼은 해야하는 형편이었다. 나는 드디어 기회가 온 것으로 판단했다. 그 친구에게 빠일른에 가지 않겠냐고 권유했다. 비록 졸업은 아직 몇 달 남았지만 그곳에서 사역하면 좋겠다고 권유했다. 그는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는 누구보다 크메르 루즈에 대해 잘 아는 친구였다. 군에 있을때 탱크도 몰았고 탱크교육 받으로 베트남에도 가고, 헬기를 타고 크메르 루즈와 전투할 때 피격되어 정글 속에 떨어져 구사일생으로 살아나온 그였다. 그러니 그는 결혼해서 사랑하는 아내와 어찌 그런 위험한 곳으로 가고 싶겠는가. 그러나 그도 가정을 꾸려야 했고 거처할 곳도 있어야 했고 또 빠일른 사람들도 구원 받아야 한다는 부담을 가지고 그 곳으로 가기로 결단했다.

 

빠일른에 조그마한 방을 얻어 사역을 시작했다. 그는 어려운 환경을 잘 이기어 냈다. 나도 한 달에 한 번 꼴로 깜뽕솜에서 올라가 필요를 공급하고 교회 허가라든지 초등학교를 세우는 일이라든지 정부 관계자를 만나는 일을 도왔다. 처음에는 호의적이었던 사람들이 점차 사역이 진행되고 2~3 년지나면서 핍박을 하기 시작했다. 정부에서 파견한 주지사는 우리에게 호의적이었지만 여타 사람들은 크메르 루즈 출신 이었기 때문에 교회가그곳에 서는 것에 대해 달갑게 생각지 않은 듯 하다. 여러 번 핍박을 하였다. 교회문을 닫게도 하고 총기, 수류탄, 폭탄장치 등으로 사역자를 없애 버리려고 하는 음모가 있었다고 들었다. 그 사역자도 더 이상 그곳에있는 것이 신변에 위협을 느껴 딸과 아내는 바땀방으로 보내고 자신과 자신의 동역자만 교회를 지키고 있었다. 참으로 위험한 나날이었다.그것이 2003 년 경이었다. 싱가폴 교회에 보고하니 무조건 철수하라고 했다. 나는 또 한번 이 문제 앞에 무엇이 잘못인지를 주님께 물어 보았다.그리고 그에게 전화를 했다. “내가 자네의 입장이라도 나는 벌써 그 곳을떠나 안전한 곳으로 도망하였을 것이다. 내가 자네에게 그 곳에 더 머물러달라고 할 수는 없지만, 지금 자네가 그 곳에서 나온다면 더 이상 우리는그 곳에서 교회를 할 수 없고 아무도 그 곳에 다시는 가려 하지 않을것이다. 그리고 분명히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그곳에 우리가 갔고, 지금하고 있는 초등학교도 더 이상 할 수 없고 문을 닫아야 하고 또 빠일른인근 다른 마을로도 계속 문이 열리고 있는데 그곳으로도 더 이상 복음을전할 수 없다. 나도 어떻게 결정할 수 없으니 기도를 하면서 판단해 주길 바란다”고 전했다. 그도 하루하루 상황을 봐가며 그 곳에 있을지 철수할지를 결정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떤 문제가 부각되었다. 이제껏 깜뽕솜 인근 마을 교회 7 개를 지으면서 그 친구가 통역으로 부지 매입이나 건축자재 구입 등을 하였다. 외국사람이 어떤 것을 구입하면 통역하는 사람이나 소개하는 사람이 그 판매자에게 커미션을 받는 것이 사회 습관으로 되어있었다. 그가 그렇게 한 것을 알고 이 문제를 가지고 빠일른에 올라 갔다. 그도 받았다고 시인했다. 나는 그것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이것은 교회이고 기업체가 아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아나니야와 삽비라 같은 죄가 될 수 있다. 나 자신도 이러한 일에 감독을 잘 못했으므로 같이 회개기도를 하고 내려왔다. 그리고 한 열흘 이 지난 어느 날 새벽 4 시경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날 새벽 1시경 강도 4 명이 침입했고 한 명이 천장을 뚫고 내려오다가 갑자기 앞이 안보여 잡혔다고 했다. 그리고 세 명은 도망했다고 했다. 잡힌 사람의 말에 의하면 그들은 전에 3번이나 그 교회 사택을 침입했고 어떤 건장한 보초들이 건물 앞에서 지키는 것을 보고 들어오지 못했다고 했다. 그는 보초를 세운적이 없었다. (p.s 이 강도 이야기는 내가 전적으로 그의 말에 의해서 적은 것이다. 어떤 경찰의 조사에 의해 적은 것이 아님을 밝혀 두고자 한다.)

여하튼 우리는 또 한번 회개의 기도, 또 그에 따른 능력을 경험했다. 왜 그때 그 오래 전에 있었던 과오가 드러나게 하셨을까. 또 그로 인해 바로 우리가 행동을 취한 것이 참 잘 된 일이었다.

나는 이 일로 크게 배운 것이 있다. 주님의 교회는 주님이 세우시고 주님이 유지해 나가시고 주님이 보호하시고 전적으로 그 분의 주권으로 움직여 짐을 알았고 우리의 할 일은 그저 순종하고 기도하고 회개하고 기다리면 된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그곳에 더 이상 교회 존재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어느 날은 아주 술 취한 사람이 그 교회를 방문했다고 한다. 그리고는 나같은 사람도 예수 믿을 수 있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그의 말을 들어보그는 크메르 루즈 통치 당시 탱크를 타고 상부의 명령에 따라 마사람들을 다 숲 속으로 몰고 가서 그 곳에서 다 쏴 죽이라는 명령받았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그 명령을 이행하고 죽은 사람을 한 사람 사람 확인하는 데 그 가운데 그의 어머니를 발견하고는 그 이후로는 술먹지 않으면 괴로워서 하루도 지낼 수 없는 그런 사람이 되었다고  한다. 참으로 그 곳에는 그런 사람들이 많이 산다. 사람들을 많이 죽인 사람들 눈을 보면 그 눈빛이 사람의 눈빛이 아니고 살기가 도는 눈빛을 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 사람들을 상대로 사역을 한다는 것이 보통 어려운 것 아닌데 그래도 그 사역자는 그 곳에서 7 년 정도를 버텼고 초창기 어려움을 묵묵히 이겨 나갔다. 그 당시는 크메르 루즈 시절 외무장관이었던 이앵사리나, 대통령을 했던 키우삼판도 빠일른에 살고 있었 그들은 그 빠일른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그냥 평범하게 살고 있었다고 들었다. 어떻게 보면 참 이해하기 힘든 민족인 것 같다. 우리나라 같으면 그렇게 동족을 살해 했으면 금방 처단하고 했을텐데, 이곳 사람들은 크메르 루즈들과 그냥 어울려 살아가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한편으로 배울 점이기도 하다. 올해 초(2013 년) 북한에서 한국과 미국을 상대로 전쟁 위협을 했을 때, 세계의 이목이 집중 되었고 캄보디아 사람들도 이제는 인터넷, 스마트폰의 영향으로 실시간으로 뉴스를 접하고 반응을 보였다. 어떤 사람은 남북한도 우리 캄보디아와 크메르 루즈처럼 서로 용서하고 같이 살아갈 수 없느냐고 반문했다. 그의 의견에 나는 깜짝 놀랐고 한참 그 이야기가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캄보디아는 경제적으로 한국보다 한참 낙후됐지만 용서의 면에서는 우리보다 한참 선진국인 것 같다.

빠일른은 또한 지뢰 밭으로 유명하다. 정부군과 교전하면서 빠일른으로 들어올 만한 진입로 부근에 많은 지뢰를 매설해 놓았다. 수많은 지뢰표시판이 길거리에 붙어 있었고 그 안으로 들어가면 지뢰를 밟을 수 있는 곳이었다. 크게 그림으로 그려서 실제 일어나는 사고 모습을 문맹률이 높은 캄보디아인에게 공지했다. 어떤 사람들은 지뢰를 캐내어 그것으로 연료로 사용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지뢰를 자기네 앞마당에 수북이 쌓아놓고 밥을 지어먹곤 했다. 우리가 하고 있는 오따바오 초등학교도 나중에 교실을 더 지으려고 중장비가 들어와 흙을 파내는데 대전차지뢰 2 개가 나타났다고 한다. 또 한 학생은 학교 밑 호수부근에서 놀다가 지뢰사고를 당했다. 그곳에서는 그러한 사고가 너무 많이 일어났다. NGO 에서 계속해서 지뢰를 파내고 폭파시키고 그러한 단체들이 항시 그곳에 상주하고 있었다.

빠일른에는 보석이 많이 묻혀 있기 때문에 어느 곳이나 물이 있는 곳이면, 특히 시냇가에 가면 사람들이 흙을 채에 담아서 빨래 하듯이 계속 문지르고 물에 씻고 해서 조그마한 보석을 찾아내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것이 노동을 해서 받는 일당보다 낫다고 한다. 참 산도 아름답고 폭포도 있고 땅도 기름지고 별 빛도 유난히 아름답고 보석도 있고 참 좋은 곳인데 지뢰 때문에 다니기가 겁이 난다. 이 어리석고 순진한 사람을 볼모로 잡아 사람 죽이는 도구로 사용하고 또 죄책감으로 일생을 살아가게 만드는 이 마귀의 요새를 깨트리기를 얼마나 성령님은 고통 가운데 탄식 하셨을까.

 

 

 

≪나비≫



노랑나비 흰나비

바탐봉에서 빠일른까지

수십 킬로 길에

수천 수만 수십만 마리

눈발이 온 사방 흩날리듯

분분히 차창으로 날아든다.

어디서 날아왔나

이 많은 나비들이

3월초 손님 태운 택시는

신작로 위를 질주하고

어린아희 영혼 같은 나비들은

마구 하늘을 질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