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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speakable Groaning

#3 성령의 말할 수 없는 탄식 : 캄보디아 에서의 선교 경험 (1997-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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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기도

선교지에 나왔지만 나는 기도라는 것을 잘 몰랐다. 신학교에서 배운 기도, 그리고 내가 선교지에 나오기 위한 기도, 나의 필요를 채워 달라는 기도, 아프면 낳게 해 달라는 기도, 문제가 생기면 해결해 달라는 그런 기도가 거의 전부인 줄 알았다.

말할 수 없는 탄식(혹은 신음)으로 하시는 성령님의 기도는 그저 성경에 기록된 것으로만 존재했고 나는 그것이 살아서 역사한다고는 거의 생각지 않았다. 그러한 성령의 기도 없이도 무난히 사역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사역지에 나온 지 채 일년이 되지 않아 그러한 기도가 있다는 것을 나에게 알게 하셨다.

1998년 아마 5월경 나는 싱가폴 교회에 사역 보고를 하고 프놈펜에 도착하여 밤이 늦어 캄뽕솜에 내려가지 못하고 어느 guest house 에서 묵었다. 집사람과 두 아이는 캄뽕솜 선교관에 있었다. 그 당시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총기를 소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밤마다 떼 강도들이 총을 들고 다니며 집을 털고 사람을 죽이고 하는 일들이 흔했다. 나는 그날 밤 따라 더욱 캄뽕솜에 있는 가족이 불안하게 생각되었다. 전화를 걸었는데도 받지 않는다. 그날따라 편두통이 심했다. 몸이 좋지 않아 저녁도 못 먹고 좀 누웠다. 가방 안에 들어있는 진통제를 먹으려 다이얼을 맞추어도 열리지 않았다. 1 시간쯤 시도했으나 못 열었다. 약국에 갈 힘도 없었다. 그냥 누웠지만 또 진통이 왔다. 또 그 다이얼을 맞추었지만 열리지 않는다. 벌써 밤 한 두시는 된 것 같다. 분명히 그 번호를 맞추면 열려야 되는데 왜 오늘따라 이 고통 속에 있는데 안 열리나. 그래, 기도나 하자. 그리고 없드렸다. '아 이 두통 가시게 해 주세요. 가방 열리게 해 주세요.' 잠시 기도하는데 갑자기 집사람 생각이 났다. 그리더니 갑자기 옛날 생각이 떠올다. 10 년 동안 직장을 10 번이나 옮겼으니 나는 내 대로 기분대로 생활했지만 집사람에게는 큰 고통이있다. 또 명목적인 신자이니 술, 담배, 방탕한 생활까지. 그리고 신학 할 때도 처가 집에서 거의 도왔으니 그간의 일들을 생각해 보니 회개가 마구 나왔다. 눈물도 많이 흘리며 회개 기도를 했다. 두통 때문에 시작한 기도가 결국은 집사람에 대한 기도에서 크게 터져 나오고 마구 기도가 나온다. 그리고 가족을 잘 지켜주실 것으로 마쳤다.

다시 한 번 그 다이얼을 맞추었는데 그제서야 열려 약을 먹었다. 다음날 차를 타고 캄뽕솜에 도착하니 선교관 주변에 사람들이 웅성웅성 한다. 그래도 워낙 아파 방에 들어가 누웠다. 얼마 후 들어보니 바로 오늘 꼭두새벽에 떼 강도가 우리 선교관을 침입하려 시도하다 실패하고 옆집에 들어가 청년을 쏴 죽이고 오토바이를 훔쳐 달아났다고 한다. 바로 그 시간 내가 엎드려 집사람을 위해 기도하던 시간. 그때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성령님의 말할 수 없는 탄식, 다가올 위험을 알려 주어야 했는데, 그것을 막아야 했는데, 내가 엎드리어 기도하지 않으면 어떻게 성령님께서 도와주실 수 있을까? 우리가 연약해도 나의 믿음과 나의 회개의 간구가 있어야 성령님도 도우신다는 것을 보여 주셨다.

그날 밤 다이얼이 바로 맞아서 가방이 열리고 약을 꺼내 먹고 잠들었으면 나는 기도를 하지 않았을 것이고 또 성령님도 도와줄 구실을 찾지 못하셨을 것이고, 그러면 어떤 사건이 벌어졌을까. 나는 여기서 또 한번 충격을 받았다. 기도가 정말 우리 신자들에게는 심상치 않은 것이구나, 특별히 이 험악한 선교지에서는 심각히 생각해야 하는구나. 그냥 평범하게 생각하고 넘어갈 문제가 아니었다. 그날 밤 집사람은 지붕에 누가 걸어가는 발자국 소리인지 자다가 몇 번 잠을 깼고, 애들이 목마르다고 해서 그 밤에 마당으로 나가 부엌에 가서 물을 가져오고 참 위험한 순간들이었다. 그 침입하려던 뒷문의 쇠가 휘도록 그 강도들이 밀고 들어오려고 했고 그 소리를 듣고 두 명의 캄보디아 동역자들은 한방에 모여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웅크리고 있었고 그리고는 총 소리가 여러 방 들리고 분명 우리 선교관이 뚫릴 수 있었다. 조금만 더 그 뒷문을 밀고했으면 그 휘어진 쇠를 보면 열릴 수 있었던 상황이었다. 물론 살고 죽고하는 문제는 하나님의 주권이요. 살아도 죽어도 주 안에서는 영광이지만 성령님은 그 때 선교지 초년병에게 그 말할 수 없는 탄식 하시는 성령님의 존재를 알리시려 하셨고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성령님을 의지하며 사역해나가기를 바라셨을 것이다.

그 날 이후 나는 문제가 조그마한 것이 생기더라도 무조건 무릎부터 꿇고 보는 습관이 생겼다. 기도는 정말 아무렇게나 해서는 안 되는 구나. 철저히 회개 하면서 기도해야 하는 구나. 그래야 그 기도를 들으시는 구나. 무슨 문제가 생기면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찾아나간다. 그것을 발견하는 것이 어떤 때는 어렵지만 그래도 일단 발견하면 무조건 사과하고 회개하고 다시 방향을 잡고, 그리고 간구한다. 그것이 자존심 상하고 하며 싫지만 그래도 더 참혹하고 괴로운 일을 당하는 것 보다는 훨씬 낫다는 것을 생생하게 경험 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회개하는 것을 얼마나 기뻐하시는 성령님이신가. 반대로 그렇지 않을 때, 성령님은 얼마나 괴로우시고 안타까우실까, 앞으로 닥칠 일을 생각하시면, 그런데 점점 이러한 것에 무디어져 가는 것이 현실이다.

선교사 생활이 오래될수록 신학교가 커져갈수록 후원이 많아질수록교회를 많이 세울수록.

그리고 또 한가지 기도에 대해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
우리는 캄보디아 교회의 부흥을 위해 2008 년부터 부흥회를 해왔다. 첫 해에는 1300 명 정도가 캄퐁솜 성경학교 산에서 먹고 자고 하면서 3박 4일 동안 캠프를 강행 했다. 숙소라든지 모든 시설이 열악했지만 전국에서 40여 교회가 모여 말씀을 듣고, 찬양을 배우고 같이 기도하고, 식사도 하고 교제하는 시간이었다. 전국 각지에서 참여 하였다. 12월은 건기이므로 비가 오지 않아, 그냥 실내에서도, 야외에서도 자리를 깔고 모닥불을 피워놓고 모기를 쫓으며 잤다. 그리고 2009년에도 12월에 제2회 부흥회를 개최했다. 한 6~700 명 정도 모인 것 같다. 한국 압해도에 있는 복용교회에서는 이 부흥회를 위해 매년 왔다. 와서는 집회장에서 24 시간 중보기도를 했다. 부흥회기간 4일 내내 조를 짜서 24 시간 릴레이기도를 했다. 참 놀라운 방법의 영적 전투를 하는 단기 선교팀 이었다. 아직 캄보디아 교회는 기도도 약하고, 회개, 부흥이라는 단어들이 너무 생소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러한 문제를 가지고 이 모임을 통해서 어떤 소득이 있기를 바랐다. 이러한 부흥회를 준비하기 위해서는 여러 전부터 그 비용을 위한 후원자를 찾아야 하고, 집회장을 계속 만들어야 하고, 숙소, 화장실, 샤워시설, 음식 등 참으로 많은 준비를 해야 했다. 그래도 캄보디아 교회의 부흥을 기다리면서 기쁘게 준비하고 강사도
섭외하고 찬양대도 훈련시켰다.

 

제 1회 부흥회 때는 외부강사를 모셨지만 제 2 회 때는 선교사님들이 강사가 되었다. “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주의 얼굴 빛을 비취사 우리로 구원을 얻게 하소서(시편 80:3)”가 2009 년 12 월 Camp 주제였다. 모든 일정이 순조로웠고 날씨도 좋았다. 마지막 날 밤 마지막 순서에 문 선교사님이 설교를 하고 있었다. 유창한 캄보디아 말로 현지인들에게 설교를 하고 있는데 한쪽 구석에서 웅성웅성하는 소리가 들렸다. 왜 저러나 싶었는데 여러 명이 우루루집회장을 떠나기 시작했다. 집사람도 뛰어나가고 있었다. 나중에 집사람한테서 전화가 왔다. 마을교회에서 온 자매 한 명이 쓰러져서 병원으로 차를 지금 타고 가고 있는데, 지금 숨도 쉬지 않고 맥박도 뛰지 않는다고 했다. 그 마을교회를 인솔해서 오신 지선교사님도 같이 병원으로 가고 있다고 했다. 나는 전화를 받자마자 혼돈 속에 빠졌다. 이제 이번 시간만 지나면 모든 것이 잘 마무리 되는데 왜 이런 일이 생기나? 부흥회 왔다가 사람이 죽어나갔다면 앞으로 이 부흥회는 어떻게 되겠는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복용교회 중보 기도팀이 있는 곳으로 가서 상황을 설명하고 긴급히 기도를 요청하고, 설교하고 계시는 문선교사님에게 가서 상황을 설명하고, 잠시 설교를 중단한 후 모든 부흥회 참석 자들과 이자매 '스라이또잇’을 위해 같이 기도하자고 했다. 우리는 바로 강대상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했고 그 참석자들도 다 같이 기도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울면서 간곡히 하나님이 살려 주실 것을 기도하고 나서 문선교사님이 다시 설교를 이어갔다.

나중에 우리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그 자매를 태운 차가 병원에 도착하고, 그때까지 그 자매는 죽은 상태였고 병원 침대에 올려 놓았고, 그 자매가 속한 교회를 담당하시는 지선교사님은 침대를 붙잡고 계속 기도하셨다고 했다. 그 시간 우리도 집회장에서 계속 기도했었고, 그리고 얼마 있다 그 자매가 살아났다고 했다. 하나님께서는,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이 자매를 통해서 캄보디아 교인들에게 전해주고 싶으셨으리라.

아무리 기도하라고 해도 3~4 분을 잘 못 넘기고 그 기도소리에는 간철함이 없어서 이것을 어떻게 훈련시키나 고심도 하고, 나 자신도 기도를 잘 가르치지를 못해 안타까웠는데, 우리는 이 일로 큰 위로를 받고, 또 큰 도전을 받았다. 그 이후도 3 회, 4 회, 5 회 부흥회가 이어졌고 복용교회도 중보기도를 위해 참석했다. 복용교회에는 기도의 용사가 많았고, 그들이 24 시간 집회장을 떠나지 않고 기도하는 모습을 통해서, 또 죽은 자매를 살리신 것이 모두 합심기도를 통해서 된 것을, 캄보디아교인들은 분명히 보았다.

우리로 하여금 간절하게 기도하기를 원하시는 성령님을 체험하는 순간이었다.

 

 


《아이들 눈》



모두들 캄보디아 아이들의 눈이

예쁘다고 한다.

왜 그들의 눈이 반짝반짝 빛날까

가난하고 아프고 더럽고

그런 곳에 사는 아이들의 눈만은

왜 그리 예쁠까

슬픔을 태우며 현실을 넘어

내일의 무지개를 보는

동심이 내어 뿜는 오색빛깔 때문일까

 

 

 


《기다림》

 

 

기다림이 습관인 듯

하오의 전차 역에서

대구간 엄마를 기다린다.

기다림이 습관인 듯

덩그런 집안에서

싱가폴 간 처자를 기다린다

기다림이 병인 듯

버거운 추수들판에서

오실 주님을 곱으로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