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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speakable Groaning

#10 성령의 말할 수 없는 탄식 : 캄보디아 에서의 선교 경험 (1997-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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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주님 다시 오심

 

 

1999 년, 새천년을 한 해 앞두고 여러 국가에서 많은 걱정을 하였다. 소위 Y2K 라고 불리는 컴퓨터 대란이 일어날 것이다. 종말이 다가왔다. 하는 소문들이었다. 내가 파송받은 싱가폴 교회에서도 1999 년 교회 캠프주제를 'count down' (카운트 다운)으로 정했다. 그리고 그 전해 1998 년에는 Total Mobilization (총동원)이었다. 캄보디아 농촌을 다니면서 마을 사람들과 이야기 하면 그들도 어디서 들었는지 내년이면 종말이 오는 것이냐고 물었다. 그 당시 캄보디아는 예수에 대하여 들어본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아직 캄보디아에도 복음이 전하여지지 않았기 때문에 종말은 올 수 없다고 대답해 주었다.

누구나 사람들은 종말에 대하여 관심이 많다. 2000 년이 되고 아무런 일도 없이 새해가 시작되자 사람들은 안심했고, 또 종말에도 관심이 없어졌다. 2012 년에도 마야의 달력 운운하며 종말을 거론하였지만 2012년도 별 일 없이 잘 넘어갔다. 그렇다고 우리가 방심할 때가 아니다. 나는 2001 년 미국의 쌍둥이 빌딩이 큰 칼 같은 비행기로 폭격 당하고 부시 대통령이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모든 사람, 국가 간에 신뢰가 사라지고 평화가 제하여져 가던 그 일을 계시록 6장의 둘째 인을 뗄 때나오는 붉은 말의 출현으로 본다. 그리고 예수님 이래로 계속해서 복음이 전해져 왔지만 특별히 새 천년인 2000 년을 앞두고 1990 년대 들어 왕성한 복음의 진보와 선교의 확장이 있은 것을 첫째 인을 뗄 때 나오는 흰 말의 등장이라 보고 2007 년을 기해 많은 재해가 발생하고, 그 이후 미국발 경제위기, 유럽발 경제위기가 전 세계를 뒤 덮은 것으로 인해 밀과 보리같은 서민들의 생활이 점점 어려워지고 부자들은 전혀 경기에 영향을 받지않는 시대를 세 번째 인을 뗄 때의 검은 말의 출현이라 보며 이제 우리는 마지막 말, 네 번째 인을 뗄 때의 창백한 말 시대에 바야흐로 접어들고 있다고 생각한다. 계시록의 해석은 주관적이고 사람마다 틀린다. 내가 받은 감동은 이러한 것이었고 그래서 2001년부터 어느 곳을 방문하든 그 교회에서 이 이야기부터 꺼낸다. '붉은 말이 나왔습니다. 또 2007 년부터는 ‘검은 말이 나왔습니다. 이제 올해부터는 ‘곧 창백한 말이 나옵니다. 이렇게 설교한다.

우리 모두가 말세 지 말에 살고 있다고 공감한다. 일본의 쓰나미는 또 다른 양상을 나타내었다. 이제는 핵 시설을 건드림으로써 피해범위가 어디까지 확산될지 모르는 시대에 살고 있고 올해 초 북한의 김정은과 군부의 위협은 어떻게 보면 창백한 말 시대에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을 설명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교회는 오히려 이 계시록에 대해서 조용하고 불법자의 입을 통해서 그 되어질 일들에 대하여 만방에 공표하는 일이 아이러니하다.

계시록은 그냥 상징적인 말이 아니라 실제로 일어나는 현실이다. 일곱인을 다 실제로 땔 것이고 일곱 나팔을 실제로 다 부실 것이고 일곱 대접을 다 쏟아 부으시고 예수님이 재림하실 것이다. 구약의 예언의 말씀을 모두 성취하시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시기 때문에 계시록의 말씀도 다 이루시고 재림하신다고 믿는다.

내가 90년도 초 처음 중국으로 가려 했던 것도 그 곳의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모르고 예수님의 재림을 모르기 때문에 그 것을 알리고 싶었고, 중국으로 가지 못하고 이 곳 캄보디아에 와서도 주로 내가 하는 일은 예수님을 전하는 것과 다가올 심판, 재림, 천국. 이러한 주제들이다. 오랜 지구의 역사 동안에 예수님을 본 1 세기 때의 사람들은 특별한 사람들이다.
또한 이제 다시 오실 예수님을 만나 볼 우리 세대는 인류 역사상 더욱 특별한 세대가 될 것이다.

이러한 것을 알고 믿는 것이 선교의 원동력이 된다. 또한 삶의 가장 큰 의미이다. 나는 한국이나 미국, 싱가폴에 가서 선교 보고를 할 때 선교지의 소식이나 필요도 전하지만 내가 중요하게 전하고 싶어하는 메시지는 바로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계시록에서 말하는 '말의 시대이다. 첫 번째, 두번째, 세 번째는 그래도 견딜 만 한 ‘말’ 이지만 네 번째 말은 정말 차원과 충격의 여파가 다른 세 말과 비교할 수 없다. '말춤'이 세계적으로 유행하고 있다. 얼마 전 미얀마를 방문하여 북쪽 따운지에 가서 어떤 목사님을 만났는데 그 말춤 흉내를 내신다. 왜 갑자기 싸이라는 한국사람이 세계적인 스타가 되었을까. 우리가 말의 시대에 살고 있는데 정작 마땅히 알아야 할 계시록의 말은 등한시 하고 말춤처럼 세상에 취해살고 있는 우리는 아닌지, 여기서 또한 성령님의 탄식함을 느낀다. 인도네시아에서 쓰나미가 일어났을 때 100 년에 한 번 일어날까 말까하는 대재앙이라 했는데 불과 7년 만에 일본에 쓰나미가 왔고 NHK 특별방송에서는 그 원전사고 대비가 조금만 잘못 되었으면 동경까지 포기해야 했다고 했다. 우리는 우리의 세대에 다섯 번째 인 여섯 번째 인... 계속해서 나팔 부는 것, 대접 붙는 것을 직접 경험 할지 모른다. 우리는 이러한 시대에 살고 있다. 계시록을 잘못 말하면 이단이라는 그러한 생각 때문에 모두들 입을 다물고 있다. 그러나 성령님은 분명 우리 각자각자 믿음의 분량대로 그 믿음을 행사하시길 원하시고 다가오는 재앙으로부터 대비를 할 것을 원하시고 , 안일하게 잠자고 있다가 엉뚱한 소리에 미혹되기를 원치 않으신다. 성경의 말씀에 비추어서, 세상이 돌아가는 형편을 잘 관찰하고 현재 이스라엘이 어떤 시간에 와 있으며, 복음이 어디까지 전해며, 적 그리스도 체계가 얼마 만큼 갖추어졌으며 또 어떻게 진행되어가를 성령에 조명하여 믿는 자마다 이 계시록을 생활화하여야 한다. 에녹은 아들 무드셀라의 이름을 통하여서도 알 수 있듯이 임박한 세상에 대한 신앙으로 살았기에 그 오랜 세월 동안 세상과 죄를 멀리하고, 신앙의 순수성을 유지할 수 있었으며, 노아도 임박한 물 심판의 긴장감속에서 하루하루를 충실히 보낼 수 있었으며, 예수님 초림 바로 전에 날았던 쿰란 공동체의 사람들도 임박한 메시아 대망사상으로 로마제국이라는 큰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믿음을 지켰고, 사도바울 자신도 여러 서신서에 나타나듯 임박한 재림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노아 방주가 하루 아침에 만들어 질 수 없듯이, 공수부대 Jump Master 가 하루 아침에 비행기에서 뛰어내려, 그려진 원안에 착지하지 못하듯이, 우리의 믿음도 숱한 훈련과 영적 전투 속에서, 불의 시험을 통과하고도 공력이 그대로 남아있는 자랑스런 존재가 될 수 있다..

우리의 인생은 참 내일 일을 알 수 없다.

나는 2011 년 부활절 다음날 참 큰 일을 당하였다. 부활절 연합 예배 설교를 하고 다음날 타피오카를 적기에 심기 위해 학생들 7명을 데리고 농장으로 갔다. 저녁 때쯤 되어 학교트럭이 와서 우리는 그것을 타고 학교로 돌아오고 있었는데 캄퐁솜 시내로 들어오는 내리막 길에서 갑자기 운전자가 브레이크가 고장 났다고 했다. 그 내리막 길은 좁다란 길이었으며 큰 트럭들이 다니지 못하게 콘크리트 기둥 두 개를 길 진입로에 세워놓았다. 우리 트럭이 앞에 가는 차를 들이 박게 생겼다. 그래서 그 길 가의 콘크리트 기둥 하나에 일부러 부딪히게 했다. 그 기둥에 부딪히자 트럭 창문이 완전히 내려 앉았다. 그런데 우리 트럭이 그 기둥을 박고 나서도 계속 내리막으로 굴러 내려갔다. 그것은 급경사로 가는 길이었다. 좌측에 골목길이 나오길래 얼른 좌회전하게 했다. 그런데 좌회전하고도 차는 서지 않고 계속 굴러내려 갔다. 나는 운전자에게 좌측이든 우측이든 아무 시멘트 벽에 차를 박으라고 했다. 그러나 그 운전자는 계속 머뭇거렸고 그러면서 트럭은 더욱 가속도가 붙어 언덕을 내려간다. 이대로 가면 모두 끝장이다. 모두 죽거나 중상이다. 운전자가 나보고 뛰어내리라고 한다. 내가 뛰어내리면 뒤에 있는 학생들은 어떻게 되나 하는 생각을 하며 안전벨트를 눌러 봤으나, 그것도 벌써 움직이지 않고 그러는 사이 운전자는 차에서 뛰어 내려버렸다. 이제 운전자 없는 차가 언덕 밑으로 굴러간다. '아, 이제 죽을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차가 오른쪽으로 기울더니 오른쪽 시멘트 벽을 세게 박고 차가 멈췄다. 차 앞부분은 완전히 박살이 났다. 나는 앞 좌석에 타고 있었는데 무사했다. 학생 한 명은 졸도 했다 깨어났다. 몇 명은 가볍게 다쳤다.

나중에 진정이 되고 나서 나는 그 당시를 회고해 보았다. 분명 나는 바로 어제 부활절 예배 때 죽음과 부활을 설교했다. 그런데 차가 벽을 들이박는 순간 나는 부활이라는 확신을 가지지 못했다. 이것이 차 사고가 나고 나 자신에 대해 슬펐던 점이다. 우리가 모두 알지 못하는 때에 갑자기 이 세상과 이별할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죽음 이후에 어떤 일이 있을까이다. 우리는 이 부활이라는 것. 또 죽음이라는 것. 또 예수님 재림. 심판이라는 문제를 정말 평상시에 심각하게 생각하며 매일매일 살아가야 한다.

 


≪그늘≫



여기에 앉아있으면

통 대나무 들이 서로 엉켜 몸을 비비며 내는

소리를 들 을 수 있다.

이 그늘에 앉아있으면

해변에서 들판을 거쳐 불어와

대나무 잎들을 스쳐온 바람냄새를 맡을 수 있다

이 길다란 대나무 숲길에 앉아 있으면

나는 교사도, 건축사 도, 감독도 아닌

피곤한 몸을 쉬고 있는 나그네 이다

 

 

 

≪성경학교 산≫

꽃이 터진다

얇은 종이 같은 꽃이

11월의 한낮의 살을 받으며

학교 산 돌계단 앞에서

빨강, 분홍, 하양이 어우러져

그 산, 황량한 풍경을 묻어 버리려

온 색조화장 화사히 하고

그 얇은몸으로

살풍경을 하나씨 터트려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