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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speakable Groaning

#9 성령의 말할 수 없는 탄식 : 캄보디아 에서의 선교 경험 (1997-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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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똘슬라잉 학살 박물관

 

 

≪뚤슬라잉 학살 박물관≫

 


야자수 둘러싸인 아름다운 교정
현대식 건물 그 향긋한 여고 교실에
철조망 둘러치고 순박한 사랑 불러다가
자물쇠 채워 놓고 철봉, 드 림, 각종 연장으로

숱한 사람 고문하고 죽였다

향긋한 세상, 낭만의 인생, 풍요의 거리에
이제 곧 철조망이 둘러 치이고
순박한 불신자 불법자 모아놓고
영원의 자물쇠 채우고 불과 유황으로
고문하고 또 고문하고
영원히 고문 할 곳

 

캄보디아에서 관광객들이 꼭 들르는 곳은 앙코르 와트나 뚤슬라잉 학살 박물관이다. 앙코로 와트는 크메르 민족에게는 최고의 가치요. 영광으로 인식되어 있고 뚤슬라잉은 크메르 민족에게 가장 치욕스럽고 슬픈 곳으로 되어있다. 1975 년 수도 프놈펜으로 입성한 크메르 루즈는 이 뚤슬라잉 학교를 정치범 수용소로 사용하면서 모든 반 정부 세력들을 잡아들이고 고문하고 또 다른 숨어있는 사람들을 찾아내어 고문하고 했던 장소로 얼마전까지 실제 해골들을 빽빽이 붙여서 캄보디아 지도를 만들어 놓기도 했다.

 

한 번 둘러보고 나면 구토가 나올 정도로 참혹한 현장의 모습을 생생하게 기록으로 남겨 보존하고 있다. '하늘에 속한 사람'에 나오는 Peter Su (피터 쉬)도 이 곳을 둘러 보더니 그래도 이러한 것을 국민들 앞에 공개하는 것이 대단하다고 했다. 그도 중국에서 오랜 감옥생활을 했지만 그리고 중국도 문화혁명을 거치고 공산주의를 하지만 중국정부는 그런 잔혹한 기록을 감히 국민들 앞에 공개하지 못한다고 했다. ‘독이 흐르는 언덕'이라고 풀이 될 수 있는 뚤슬라잉. 그 말대로 독이 흘러도 철철 강물처럼 흘렀다. 처음 캄보디아에 와서 듣는 이야기는 온통 크메르 루즈 당시 어떻게 살아가고 죽어가고 했는가 하는 것이었다. 안경을 썼다고 죽이고, 손이 보드랍다고 죽이고, 코카콜라가 먹고 싶다고 했다고 죽이고, 밥 먹다가 숟가락을 부러뜨렸다고 죽이고, 배고파서 몰래 개구리 잡아 먹었다고 죽이고, 외국 말 할 줄 안다고 죽이고 그야말로 바보가 되어야만 생존할 수 있는 시절이었다. 강한 의지로 평소 생각하고 말 하던 것을 잊어 버리려고 안간힘을 써야 생존할 수 있었고 평소 배웠던 외국어를 온 힘과 집중력을 다해서 잊어버려야 무의식 중에라도 그 단어가 튀어 나오지 않으므로, 그렇게 처절하게 내면적으로도 자신과 싸워야 했다.그래서 그런지 그 3 년 9 개월간의 크메르 루즈 기간을 거치고 나서중국인들도 자기 중국말을 거의 잊어버렸다고 했던 시절이었다. 열댓 살된 크메르 루즈 당원이 낮에 와서 어떤 집에 가서 그 집사람에게 저녁에와서 '교육을 좀 받아라'라고 하면 그때부터는 온몸이 사시나무 떨 듯떨리고 죽는 고통보다 더했다고 했다. '교육'은 곧 그 저녁에 죽이겠다는의미였다. 저녁까지 기다리는 그 시간은 죽음보다 더 큰 고통이라고 했다. 1997 년 캄보디아에 처음 갔을 때도 그 사람들의 눈은 두려움이 가득했다. 크메르 루즈 시절이 끝난 지가 거의 20년이 지나도록 그들의 영혼은 그 공포시대의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선교팀이 방문할 때 마다 뚤슬라잉을 안내해야 함으로 나는 그 곳을 몇십 번도 더 갔다. 자꾸 다니면서 묘한 것을 발견했다. 크메르 루즈가 프놈펜에 입성했을 때 프놈펜 시민들은 그들을 환호했다는 것이다. 그리고이 뚤슬라잉에 있는 정치범 수용소로 사용됐던 그 고등학교는 참 낭만적이고 평온했었다. 그 3 층짜리 콘크리트 건물들은 제법 근사한건물들이었다. 1975 년에 크메르 루즈가 캄보디아를 장악할 때 나는고등학생이었고 우리 한국에도 그 때 학교가 목조 건물이 많이 있었다. 그때는 캄보디아는 한국보다 생활이 못하지 않았다. 그리고 1978 년'Times'를 사서 영어공부를 하였는데 그 때 크메르 루즈에 관한 기사가짤막하게 났었다. 크메르 (Khmer)는 캄보디아이고 루즈 (Rouge)는불어의 붉은 색이라고 했다. 붉은 천 같은 것을 항상 두르고 다니는 캄보디아인이라고 설명했고 지금 그 안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아무도모른다고 했다. 어떤 저널리스트도 그 곳에 들어갈 수 없다고 했다. 20년 뒤 내가 이 곳으로 선교사로 나올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다른 기사들은 다 잊어버렸는데 왜 그 기사는 이제껏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을까.

뚤슬라잉은 지옥의 모형처럼 보인다.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생각해 낼 수 있는 가장 극한 잔인함이 이 곳에 전시되어 있다. 그러기에 영적인 이미가 강한 곳이다. 세계 최대 이 우상과 이 학살 기념관은 결코 무관하지 않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 보이지 않는 우상을 섬기고 있는 것도 곧 올 심판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뚤슬라잉을 방문하는 사람은 성령의 말할 수 없는 탄식함을 들어야 하지 않을까?

이제는 이 뚤슬라잉을 방문할 때마다 슬픈 캄보디아인의 역사를 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주님 앞에 섰을 때, 우리가 심판대 앞에 섰을 때, 그리고 풀슬라잉과 같은 지옥에 떨어져야 하는 사람들을 생각할 때 느끼는 두려움과 비애감을 느낀다. 뚤슬라잉은 역사이면서 경고이다. 뚤슬라잉 근처로 많은 유령들이 떠돌아 다녔다고 했다. 그것을 묘사한 작품들도 전시되어 있다. 그 유령들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너희들도 우리처럼 그렇게 방심하고 있다가 양의 탈을 쓴 이리에게 당하려느냐, 너희도 그렇게 물질과 욕망에 이끌리어 우상을 섬기다가 우리처럼 이런 처절한 고통 가운데 죽지도 못하고 괴로워 하겠느냐.

뚤슬라잉은 우리에게 강하게 항변한다. '믿는 자여 정신차려라'

 


≪성경학교 산≫

 



유순하고도 아늑하였을 산

그러나 이제 흙을 거의 퍼내 간

이 언덕빼기 산

바위와 잡초, 부석한 암반만이

시뻴건 상처와 흉한 풍경을 이루며

밤이면 뱀들의 울음소리로

가슴 조이며, 그것도 또

다른 임자에게 팔려 나갈까

소리 없이 떨고 있다.

사단이 이 나라를 훑어 갔음을

모조리 쓸 만한 것이면 모두

이 땅에서 퍼내어 갔음을

반쯤 죽이고는 또 팔아 넘기려 함을

그 몸으로 항변이나 하는 듯

온종일 속 상처를 보이며

소리 없는 울음을 퍼붓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