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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speakable Groaning

#2 성령의 말할 수 없는 탄식 : 캄보디아 에서의 선교 경험 (1997-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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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싸이판, 싱가폴 그리고 캄보디아

싸이판은 파라다이스 같은 섬이었다. 나는 1988 년경 괌, 싸이판을 다녀온 후, 이제 한국의 것을 정리하고 싸이판에 가기로 마음 먹었다. 서울에 있는 아파트도 처음 구입 할 때보다 많이 올랐고, 더 이상 한국에서는 나의 자본으로 뻥튀기 할 수 있는 기회는 없는 것 같았다. 그것을 팔아서 모두 싸이판으로 옮겼다. 그 곳에서 새로운 투자 내지는 투기를 계획했다. 그래서 1989 년 그 곳으로 이주를 했다.

그때만 해도 그곳에 한국인은 거의 없었고 거의 일본 관광객들뿐이었다. 바다 색깔은 원시 자연 그대로의 신비로운 색을 띄었다. 이곳에서 한 번만 더 잘 하면 평생 편하게 휴양을 하면서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곳에서 4 년 반 만에 나는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경기는 계속 안좋아갔고 손을 대는 것마다 실패했다. 그러면서 교회에 가서 온 마음으로 매달렸다. 성경도 많이 읽었다. 이 일만 잘 풀어주시면 중국에 교회도 짓겠다고 서원도 했다. 오직 나에게 있는 것은 시간 뿐이었다. 아침에 해변에 나가 묵상하고 온 종일 묵상의 시간이었다. 그 당시는 참 많은 꿈을 꾸었다. 하늘에 무수한 사람들이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둥둥 떠오는 꿈. 그 꿈은 나에게 도전이었다. 나도 저 사람들처럼 나의 십자가를 져야하는구나. 선교에 대한 나의 마음은 점점 강해졌다. 나도 저 바울처럼 저베드로 처럼 복음을 전해야지, 나는 점점 뜨거워갔다.

어느 날은 내가 꿈 속에 50 층도 넘는 높은 빌딩 속에 있었다. 그런데 저바다 멀리서 100 층 높이도 더 되는 해일이 몰려오고 있었다. 꿈 속에서도 '아, 저 해일이 이 육지까지 밀려오면 우리는 다 죽는구나' 하면서 꿈을 깼다. 그리고 삼일 후 싸이판에는 진도 8.1 의 지진이 있었다. 그러나 해일은 없었다 마음이 급했다. '성경에서 말하는 세상 끝 날이 점점 다가오는데, 아, 나도 복음을 전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어떻게 하면 될까? 그 생각으로 가득했다. 내가 다니는 교회는 조그마한 교회였다. 그 당시 싸이판에는 중국에서 온 많은 봉제공장에 일하는 자매들이 있었다. 그래서 우리 교회도 중국 선교를 시작했다. 그냥 그들을 봉고차로 데리고 와서 교회에서 식사를 하고, 어디 가고 싶다고 하면 차로 데려다 주고, 같이 야유회 가고 그것이 고작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영어를 가르쳤지만, 말이 안 통하니 성경은 가르칠 수 없었다. 무척 답답한 시간들이었다. 그런 대 싱가폴에서 중국말을 하시는 64세 되신 여자선교사님이 와서 동역하면서 중국 사람들은 100 명으로 늘고 성경, 찬송 등 모든 시간들이 활기를 띄었다. 나는 선교를 배울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다. 그러면서 그 선교사님이 내가 선교할 마음이 있는 것을 알고 싱가폴에 있는 신학교를 소개하여 주었다. 나는 싸이판에 나의 세상 욕망을 이루기 위해 갔다가 거기서 철저히 인생의 광야기간을 보내며 하나님을 붙잡는 계기가 되었으며 그 Mrs. 심 선교사를 통해서 싱가폴로 가는 문을 열어 주셨다.

 

Rev. Timothy Tow

 

싱가폴에 가니 토우(Rev. Timothy Tow)목사님이 기다리고 계셨다. 그분은 Life B.P 교회를 1950 년도부터 담임하고 계셨고, 원동신학교를 운영하고 계셨다. 그리고 성경 장로교회를 싱가폴에 처음으로 도입하신 분이었고, 많은 신학생들이 배출되어 싱가폴에 많은 성경장로 교회가 설립되였다. 3 년 동안 그 곳에서 생활하는 동안 많은 것을 배려해 주셨고, 신학 뿐 아니라 목회나 경제 생활에 대해 그 분으로부터 배웠다. 나는 이제껏 세상 경제에 대해서는 알았어도 신자로서의 경제생활에 대해서는 배우지 못했다.

교인이 1500 명 정도 되는 교회를 담임하고 계셨는데 재정의 대부분을 선교로 사용하고 계셨다. 그 큰 예배당에 에어컨도 달지 않고, 그렇게 몇십 년을 목회하고 계셨다. 싱가폴은 에어컨 없이는 생활하기 힘 드는 곳이다. 그냥 선풍기만 사용하시면서도, 동남아 거의 모든 국가에 선교를 하셨다. 이곳에서 나는 선교에 대해 알게 모르게 많이 접할 수 있었다. 중국 사람들 특유의 급하게 서두르지 않는 안정적인 선교에 대해 배웠다. 그리고 철저히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움직이는 그들의 생활 속에서 나 자신도 그렇게 변해갔다.

신학교에는 아프리카, 미얀마, 인도네시아, 태국, 베트남, 싱가폴, 호주, 미국, 말레이시아, 필리핀 등 여러 나라 학생들이 있었다. 물론 한국학생도 많았다. 그 곳에서 신학 뿐 아니라 그들의 사고방식, 생활방식, 또 어떻게 그 나라에서는 선교가 이루어지는지를 배웠다. 또 싱가폴에는 많은 사람들이 들렸다 가는 곳이므로 세계 각국 많은 교수나 선교사들이 와서 간증을 하고 강의를 하고 갔다. 그들을 통하여 선교의 실상을 묻고 배울 수 있었다.

이 동남아의 조그마한 나라. 그냥 해운, 금융, 무역의 중심지라고만 생각했었는데 하나님은 선교의 전초기지로 사용하고 계셨다. 싱가폴은 경제력이 대단하고 지식인층 중에 크리스천이 많기 때문에 교회가 힘이 있다. 미리 오래 전부터 영국 식민지로 있게 해서 영국식 교육과 영어를 국어로 쓰고 있고, 중국인 특유의 근면함과 성실함이 결합되고 지정학적인 요지인 것 까지 상승효과로 작용했고 이관유, 고촉동,이시앤롱 등 탁월한 정치가들이 이 나라를 이끌어 왔으니, 이 나라는 탄탄대로를 걸어 왔다. 그렇게 알찬 나라로 만드신 것도 그 숨은 뜻이 분명있으리라, 오는날 이 동남아에서 되어지고 있는 선교의 현장에 눈에 확연히 늘이나것은 없지만, 싱가폴 교회가 관여하지 아니하는 것도 거의 없다, 조그마한 것을 들어 요긴하고 그게 쓰시는 하나님, 나는 이 싱가폴을 통하여 그분의 지혜를 보았다.

나의 신앙관, 경제관, 도덕관, 선교관이 이 곳에서 많이 영향을 받았고, 또 개선되었다. 3 년의 노력 끝에 나는 목회학 석사학위를, 집사람은 종교학 석사를 받았다.

나는 캄보디아로 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중국으로 가기 위해서 그간 준비해 왔다. 싱가폴 원동신학교(Far Eastern Bible College) 에서 신학을 하고 틈틈이 중국말을 익히고 중국인 예배에 참석하고 성가대도 하고 오직 중국을 위해 기도해 왔다. 중국어 신약 Tape 는 20 번 이상들었고 신.구약도 2 번 이상 중국어 성경으로 읽었다. 이제 신학까지 마쳤으니 하나님이 나를 중국으로 인도하시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중국으로 가기 위해 싱가폴에서 신학을 했다. 신학, 영어, 중국어를 같이 훈련 받고 이제 내 나이 40 살이 되었으니 더 이상 시간을 허비할 수 없었고 빨리 선교지로 나가고 싶었다.

그러나 졸업을 했는데도 아무 소식이 없다. 누가 파송을 해준다거나 후원을 해준다거나 하는 조짐이 전혀 없었다. 중국을 한 번 다녀올 비행기값도 나에게는 없었다. 무엇이 잘못인가? 잠시 고민에 빠졌다. 그때 캄보디아에서 내전이 터졌고 그 당시 캄보디아에서 일하시던 Jimmy Rim(임세종) 선교사가 가족과 같이 싱가폴로 피신을 나와 잠시 있으면서
캄보디아 사정을 싱가폴 교회 (Life B-P Church) 앞에 보고하였다. 싱가폴교회는 그 보고에 갑자기 온 교회가 들써였다. 캄보디아로! 캄보디아로!

 

 

《캄보디아》



참 묘한 땅이다 캄보디아가 

 

열린 듯 하면서도 닫혀있고 

 

단단한 듯 한데 푹 들어가고

 

잠겼다 나왔다

비가 쏟아 붓다 금방 게이고

가난한 듯 하면서 부한 듯 살고

두 마음, 두 얼굴이 자연스레 공존하는

이 사람들, 이 땅


싱가폴 교회는 한국인인 나를 안수를 해서 캄보디아로 파송했다. 그 파송 받은 1997 년 8 월은 아직 내전 중이었다. 밤마다 기관총소리가들렸고 북쪽 바땅방을 전선으로 하여 훈센군과 크메르루즈군이 전투를하고 있었다. 나는 프놈펜에 한 달 있다 Jimmy Rim 선교사의 지시에 따라 캄뽕솜(Sihanoukville)으로 내려가 사역을 시작했다. 이곳에서 한 일 이년 사역 하다가선교사 현지적응 훈련을 마치고 하나님께서 중국으로 인도하시리라 믿고 중국말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중국어 성경을 가르쳤다. 그러나 사역의 문은 하나씩 하나씩 열려갔고 이곳 캄보디아가 하나님이 예비하신 곳 임을 몇 년이 지나서야 확신하게 되었고 크게 확대 복사해서 공부하던 한박스나 되는 중국어 성경들을 다 없애버렸다.

주님을 다시 만나고 복음을 중국인에게 전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어 싸이판에서부터 중국어 공부를 시작했고 싱가폴에서의 신학훈련이 마치면 당연히 준비한 대로 중국으로 간다고 믿었다. 중국어 신 구약모르는 단어를 다 옥편을 찾아 뜻과 발음을 적어놓고 성경녹음을 해서듣고, 항상 중국을 위해 기도했다. 그렇게 싸이판에서도, 또 싱가폴에서도 기도하고 준비했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기도였고 나의 신념이었고 나의 비젼 이었다. 내 속에 계시는 성령님의 말할 수 없는 탄식은 그 중국이 아니라 캄보디아였던 것을 비로소 이 땅 캄보디아에 와서 그것도 몇 년지나서야 알게 되었으니 참으로 나의 믿음과 기도가 얼마나 하나님과 차이가 있는가 하는 것을 깨달았고 또 한번 감사와 충격을 받았다.

 

내가 아무리 그 일을 위해서 열심히 기도하고 오래 준비하였다 할지라도, 그것이 성령의 뜻과는 판이하게 틀릴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 놓아야 한다는 것을 배운 것이다. 삼십 대 중반에 신학을 하고, 3 년 동안 헬라어 히브리어 그 단어 외운다고 거의 매일 새벽 1 시까지 공부하고 영어로 수업듣고 숙제하고, 집사람도 신학을 같이 했으니 각자 빨래 각자하고시간이 없는데 그 시간을 또 쪼개서 중국어까지 해야 했고 정말 일생 동안공부해 본 것 중에 가장 심하게 했는데, 그렇게 어려운 가운데 습득한 그언어인데도 그곳으로 갈 수 없다는 것이 섭섭하기도 했다. 그러나, 성령님이 전적으로 옳았다. 사역을 시작하는 나로써는 너무 크고 귀중한 교훈이었다. 나는 이제껏 내 방식, 내 생각대로 해왔다. 고 2 때 이과가좋을 것 같아 이과 했다가 3학년 때 이과가 싫증나서 문과로 옮기고 또 대학은 이과로 갔다. 또 적성이 안 맞아 재수해서 경영대로 가고 대학졸업하고 삼성전자에 입사했다. 너무 빡빡한 분위기에 하루 만에 나와 럭키 엔지니어링에 갔다가 외국 가고 싶어 대한항공 승무원 했다가 좀 더 외국을 둘러보기 위해 이번에는 여행사에 들어갔다. 이제는 여행도 다해봤고 돈 좀 벌어 보려고 이민을 갔다. 결국 사업에 실패했다. 대학졸업하고 딱 10년 만에 나는 10 가지 직장을 경험 하면서 나에게 맞는것은 없었다. 과연 나의 적성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봉착했고 그 곳에서나는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는 것이 나의 적성이라는 확신을 얻었다.그렇지만 사역지에 나와서도 나의 습성은 다시 되살아날 것이 뻔했고 그 곳에서 성령님은 나의 적성, 나의 생각, 나의 계획을 포기할 것을 크게 가르치셨다. 그 동안 나는 내 적성을 몰라 오랫동안 방황하며 탄식했고, 내안의 성령님은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내 방향을 잡아 줄려고 했어도 나는 그것에 대해서는 맹인이었다. 인생을 살아가는 크리스천들에게 성령의 이 탄식함을 안다는 것이 얼마나 그들의 인생을 보람되고 기쁘게 해 줄 수 있을 인가.

사람마다 그에게 꼭 알맞은 직업이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것을 무시하고 일반적인 세상 풍조와 인기 있는 것에만 따라간다. 이것은 피차간 고통이다. 특히 사역의 길로, 선교의 길로 접어든 사람들에게는 더욱 더 분명하게 성령님은 지시한다고 믿는다. 분명한 장소, 분명한 사역, 분명한 직분. 그것을 발견하고 순종하는 것이 성령님을 기쁘게 하는 일이요, 그렇지 않고 일반적인 풍조나 나름대로의 신념으로 이루어지는 사역들은 성령님께 큰 우환이 될 수 있다. 특히 선교는 성령님께 속한 사역이다.

 

《땔감 운반》



잔가지 굵은 가지 등나무줄기에 묶어

큰 단 작은 단 만들어 어깨에 얹고

엄마는 앞서고 딸은 뒤서고

소아는 중간에 서서

산길을 걸어가고 있다

힘든 걸음 우물 파는 곳에 멈춰 서서

엄마 한번 딸 한번 깊은 우물 들여다보고

아들은 빠질까 못 보게 하고

일꾼들과 이야기 나눈 뒤

길다란 나뭇짐을 또 다시 어깨에 얹고

대나무 우거진 그늘 밑으로

왔던 그대로 같은 행렬을 해서

세 사람이 걸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