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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speakable Groaning

#1 성령의 말할 수 없는 탄식 : 캄보디아 에서의 선교 경험 (1997-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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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선교에의 회고

2013 년 5월 26 일 주일, 대구의 어느 교회에서 설교를 했다
일 년에 한두 번씩 한국을 방문해 선교보고도 하고 필요도 알리고 평소 전하고 싶었던 말씀도 전하고 하는 것이 지난 16 년간의 선교사 생활의 한 부분이었다. 로마서 8장 26 절의 말씀으로 '이와 같이 성령님이 우리를 도우신다'는 내용이었다. 예배가 끝나고 어느 집사님이 성령의 말할 수 없는 탄식에 대해 경험한 것을 이야기해 주셨다.

그 내용은 어느 날 기도를 마치고 막 잠이 들었는데 다른 자기가 몸속에서 나타나 자신을 위하여 연이어 기도하는데 그 기도가 폭포수처럼 강력하고 본인이 평소 생각지도 못했던 내용을 막 쏟아 붓듯이 기도하시는데 자면서도 그 내용이 너무나 옳은 것이어서 계속 아멘, 아멘하였다고 한다. 나중엔 아멘을 할수록 몸은 고무 풍선처럼 부풀고 고통스러웠지만 아멘을 하지 않을 수 없어 계속하였더니 결국은 그 몸이 터지고 말았고 그로 인해 잠을 깼다고 한다.
성령님께서 자신의 몸 속에서 그렇게 탄식하시며 기도하고 계신 줄을까마득하게 알지 못했는데 그 일로 몹시 놀랐다고 하셨다.

그리고 또 몇 년 전의 일이다. 어느 장로님이 한국에서 캄보디아에 오셨다. 그리고는 선교를 하시려고 하는데 마땅한 장소를 찾는다고 하셨다. 그 분과 같이 그 분의 사역지를 찾기 위해 탐사 여행을 떠났다. 라오스와 캄보디아 여러 곳을 보여드렸다. 캄보디아에 오시게 된 경위를 나에게 이야기 해 주셨는데, 그 내용은 얼마 전 동부인해서 베트남과 캄보디아의 앙코르 왓트 지역을 관광 하셨는데 똔레삽 호수부근에서 가난하게 살아가는 어린애들을 보는 순간 갑자기 눈물이 줄줄 흘러 내리셨다고 한다.그리고는 그 눈물이 그치지 않고 계속 흘러내리는데 너무 이상하고 당황스러웠는데 한국에 돌아와서도 그 눈물이 빗물처럼 흘러내리는 것이 멈추지 않아 너무 놀라서 하나님께 물어 보았는데 속에서 들리는 음성이"너가 내대신 그 불쌍한 아이들의 아비가 되어 줄 수 없겠느냐'는 말씀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하시던 건강원을 처분하고 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곳에 와서 어떻게 일을 시작하여야 할지를 찾고 계신다고 하셨다.

나는 이 두 사건을 접하면서 성령의 탄식하심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되었다. 평소에 내가 관념으로만 알던 성령의 탄식하심은 너무나 피상적인지식이었고 경험이었다. 성령에 대해 신학교에서 강의도 하고 교회에서 설교도 하고 나 자신도 성령을 가지고 있다고 막연히 믿고 있었지만 성령의 탄식함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너무 모르고 있었다. 이 두 사건은 나에게는 충격이다. 분명히 동일한 성령님께서 내 속에서도 그 집사님처럼 폭포수 내리쏟듯 말할 수 없는 고통과 탄식과 힘과 간절함으로 나를 위해 기도하고 있을 것이고 또 그 장로님처럼 그 엄청난 양의 눈물이 흘러내리듯 그러한 연민과 아픔으로 내 속의 성령님이 내가 하고 있는 이사역지 마다 그 마을 사람들을 바라보고 계실 것이기 때문이었다.

성령님은 그저 크리스천들이 공허히 말하는 그런 분이 아니셨다. 요 몇년간 사역의 한계와 나 자신의 믿음의 한계에서 나는 많이 고통 하였고 성령에 대하여 알고자 하였다. 그저 성령님, 성령님 만 중얼댔다. 그저 선교관 긴 복도를 왔다 갔다 하며, 또 신학교의 언덕을 오르 내리며 성령님만 간구하였다. 이제, 그 성령님의 탄식함이 어떤 것인가를 조금이라도 알게 되니 감사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 성령님의 탄식함에 부응하지 못하는 나 자신이 한탄스럽다. 이로 인하여 나는 이제껏 사역을 하고 하게 되었고 성령님께서 어떻게 내 속에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이제것 함께 하셨고 나는 얼마만큼 그 분에 뜻에 맞게, 혹은 틀리게 일했는가를 점검해 보는 시간을 가져본다.

성령의 탄식함을 이해하는 것은 오늘날 교회에서 큰 주제가 됨이 마땅하고 실망과 고통 가운데 있는 자에게 위로가 될 것이고 사역의 딜레마에 있는 자에게 분명 길을 보이실 것이고 또한 마지막 시대에 피난처로 인도하실 것이다.

 

 

《성령 》


내가 가만히 있으면, 그도 가만히 있고

내가 포기하면, 그도 포기하고

내가 움직이면, 그도 움직이고

내가 힘쓰고 애쓰면

그는 더욱더 힘쓰고 애써준다

 


나는 아버지가 창원에서 군 복무를 하실 때 창원에서 태어났고 그 다음 어디로 이동하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기억이 나는 것은 전남 광주에서 살았다는 것과 그리고 내가 원주에서 1 학년에 입학하였고 2학년 때는 동두천에서 더 들어간 봉암리로 이사 갔다는 것이다. 그곳은 아주 시골이라 나는 분교에 다녔다. 아마 2학년 3학년이 합반해서 수업을 했고 1 학년에서 4 학년까지만 있었고 전교생이 50 명 정도 된 것 같다. 우리 집 바로 위에 예배당이 있었다. 나는 예배당에 나갔고 열심히 찬송을 배우고 성경 이야기를 들었다. 전도를 해 오면 선생님이 포도송이에 하나씩 하나씩 색칠을 해 주었기 때문에 나는 전도를 열심히 해서 어서 그 포도송이를 빨리 다 채우고 싶었다.

 

내 친구들을 많이 데리고 갔다. 우리 마을은 겨울만 되면 미군들이 전투연습을 하는 장소였다. 큰 비행기에서 수십 개의 낙하산들이 하나씩 떨어져 나오고 그 낙하산은 곧 펴져서 아름다운 색깔들이 나타나고 천천히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면 너무나 신기롭고 황홀했었다. 하늘에서 그렇게 멋있는 것들이 떨어지면 우리 동네 아이들은 모두 나가 그 하늘을 쳐다보며 그 낙하산이 어디로 떨어지는지 그 곳으로 달려갔다. 어떤 미군은 냇가에도 떨어지고 나무 위에 걸리기도 하고 어떤 미군은 지붕 위에 떨어지기도 하는데 어떤 미군은 땅에 그려놓은 원 안에 정확히 떨어지는 사람도 있었다. 참 신기했다. 대부분 군인들은 땅에 떨어지자 마자 그 낙하산이 바람에 날리면서 낙하산을 따라 몇 십 미터나 백 미터 이상을 막 끌려가는 때도 있다. 그럴 때면 큰 형들은 미리 준비한 면도칼로 그런 사람을 따라가서 낙하산 줄을 끊어오곤 했다. 나중에 팽이 줄로 사용하기에 너무 좋은 줄이었기 때문이었다. 또 미군들은 서로 아군 적군으로 나누어 우리 동네에서 전투를 했다. 소총에다 연습탄을 넣고 서로 총을 쏘고, 꼼짝마! 움직이면 쏜다! 이렇게 포로로 잡기도 하고 골목길을 뛰어다니며 전투연습을 했다. 그러면 우리들 그 군인들과 같이 뛰었다. 그들이 쓰는 연습탄에서 탄피가 튀어나자마자 그것을 먼저 주어야 했다. 보통 한번씩 방아쇠를 당기면 두 세 개씩 탄피가 떨어진다.  그  뜨거운 것을 먼저 주어 주머니에 넣고 또 그 군인을 바짝 쫓아다녔다. 탄피 하나에 2원이었다. 엿가락 두 개를 살수 있는 돈이다. 그러니 그 미군들이 실전연습을 하는 날은 큰 수입을 올릴수 있는 날이기 때문에 우리도 그 전투에 늘 참가하곤 했다. 전투라는 개념은 어릴 때부터 나에게는 생생한 현장의 것으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학교 선생님들은 수업시간에 늘 당부말씀을 하시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개울이나 산이나 어디서든지 터지지 않은 포탄을 보면 절대로 그것을 두드리거나 돌로 내리치지 말라고 했다. 그러다가 포탄이 터져서 사고가 많이 났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사는 마을은 아름다운 냇물과 산과들이 있는 정겨운 마을이었지만 우리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전투하고싸움하는데 익숙해져 있었다. 나는 이 시골 봉암교회에 한 1년 정도 다닌것 같다. 아주 열심히 다녔다. 교회 종도 딴사람이 치기 전에 내가 먼저가서 치고,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서도 그 이야기를 재미있게 듣고 찬송도 많이 배웠다. 우리를 가르치시던 선생님은 팔이 한쪽이 없으신 분이었다. 그 곳에서 이제는 부산으로 이사 갔다. 거기서 4 학년을 다녔고 5 학년때는 대구로 왔다. 부모님들은 교회에 다니시지 않으셨기 때문에 나도 부산에 이사 와서 부터 교회에 다니지 않았다.

중학교, 고등학교 때도 교회에 나가본 적이 없다. 교회를 까마득하게 잊고 살았다. 대학 때도 도서관에서 참 많은 책들을 읽었다. 그러나 성경은 읽어본 적이 없다. 철학과 문학서적을 많이 읽었다. 군에서 제대하고복학을 하고 집사람을 만나면서, 또 결혼을 하기 위해 처가 집을 방문하니 예수를 믿지 않으면 딸을 줄 수 없다고 하셨다. 그래서 그때부터 교회를 나갔고 그냥 형식적으로 예배에 참가했다. 

 

어릴 때 배웠던 찬송가도 몇 곡 생각났다. 그러니까 나는 어릴 때 1 년간 예수를 믿고 근 20 년간 예수 없이 살아가다 또 예배당에 나왔지만 그냥 껍데기 신자였다. 내가 나중에 선교사가 되고, 어릴 적 믿던 그 봉암교회가 생각이나 그 곳을 떠나온 지 40 년이 되어서 그 곳을 한 번 방문하고 싶었다. 한국 갈 기회가 있어 서울에서 동두천으로, 또 그 곳에서 봉암리라고 쓰여있는 버스에 무작정 올라탔다. 그 동네도 변했을 것이고, 어디에 그 교회가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으나 그냥 한 번 가 보기로 했다. 봉암리에 내리니 당황스러웠다. 옛날의 모습을 찾을 길이 없었다. 40 년이 지났으니 그래도 그 곳이 봉암리라는 이름을 그대로 쓰고 있으니 그 곳이 내가 살던 곳인 것 만은 확실했다. 교회도 여러 개 보였다. 그 당시에는 내가 다니던 교회 하나밖에 없었다. 교회 한 두 군데를 들어가서 물어봤다. 세운 지 몇 년이 되었는지 물어봤다. 모두 아니었다. 그냥 돌아가자니 좀 허전했다. 그 멀리서 이곳까지 왔는데, 그 신앙의 고향을 한번 보았으면 했는데, 그런데 갑자기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 경로당을 찾아가자. 그 곳에 있는 노인에게 물으면 혹시 알지도 모르니, 그래서 경로당에 들러 어느 할머니에게 40 년 전부터 있던 예배당이 어딘지 물었다. 그 할머니의 말대로 찾아갔다. 그 곳은 봉암감리교회였다. 예배당에 들어가 목사님을 만나 자초지종을 이야기 했다. 그 목사님도 부임 하신지 10 년 정도 되셨다고 하셨는데, 그 교회가 맞다고 하셨다. 그래서 그 당시 우리 주일학교를 가르치시던 분이 팔이 한쪽이 없으셨다는 이야기를 하니 그 분이 여기서 좀 떨어진 곳에 사시지만 가끔 교회에 오신다고 하셨다. 그리고 바로 전화를 하셔서 40 년만에 그분을 만나게 되었고, 얼굴은 서로 기억나지 않지만 서로 얼싸안았다.

 

두번째 봉암감리교회 방문, 애석하게도 나의 주일학교 선생님은 몇 년전에 소천하셨다고 한다.  (2019.10.20)



그 목사님의 이야기로는 이 봉암교회가 여러 번 없어질 뻔한 위기에 있었다고 하셨다. 그간 40 년간 시골 교회이니 여간 어려움이 대단했을까. 그러면서 나의 인생을 돌아보았다.

이 봉암교회에서 예수님 영접했고, 분명 성령님도 그 때부터 내 속에 내주하셨을 테고, 그러나 나는 금방 예수님을 잊어버렸고 그 오랜 세월 죄와 방탕, 마음의 우상 속에서 살았으니 성령님의 탄식하심이 얼마나 심하셨을까. 오랜 세월 끝에 교회에 나왔으나 또 형식적인 교인으로 얼마나 오랫동안 지냈었던가. 또 그에 따른 그 분의 고뇌는 얼마나 크셨을까. 나는 이곳 캄보디아에서 사역 하면서 참 실망과 좌절을 많이 했다. 신학교 졸업생이 늘어가고, 교회가 늘어 가면서 마음 아픈 일들도 늘어갔다. 왜 저렇게 변화되지 않을까. 왜 그렇게 밖에 못할까. 참 딱한생각이 들 때가 너무 많다. 그러나 내 인생을 돌아보면 그 오랫동안의 이탈. 그 오랫동안의 어린애 같은 기간. 불신자의 생활. 명목적인 교인으로서의 생활. 죄 된 생활. 이 모든 것이 나의 인생이었기에 그들을 탓할 수도 없다. 그리고 속이 타지만 나 자신을 보면서 인내하고 받아들일 수 있었다 성령님은 속이 타시지만 나를 위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시고 오랜 세월을 인내 하셨는데 내가 그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10년 20 년 못 기다리랴. 봉암교회는 나의 첫 교회였고 내 믿음의 고향이었고, 교회가 몇 번이고 없어질 뻔했던 것처럼 나도 내 인생에서 완전 주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갈 뻔 한 일들이 몇 번 있었지만, 그 분은 봉암교회도 나도 포기하시지 않았다. 나도 그 교회의 한 지체였고 그 지체의 방황이 얼마나 길었나 봉암교회를 통하여 다시 보게 되었다. 또 그때의 믿음이 죽지 않고 살아있게 하심을 놀랍게 바라본다.

캄보디아서 사역하면서 어린 아이들을 보면 저 애들 중에도 나와 같이 나중에 복음을 들고 나갈 사람이 있겠지 하는 생각을 하고, 주일학교 사역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나 자신을 통해서도 알기에 더욱 관심을 갖는다. 이제 이 어린 세대가 그들의 ‘봉암교회'를 만나 주님과 성령을 체험하고 이 인도차이나에서 뜨거운 나라가 되기를 기도할 뿐이다.

 


《오뜨레스 마을》


길따라 초가집 스무 채

앞 바다에서 잔 새우 잡아 말리며

하루하루 살아가는 동네

지푸라기로 된 지붕, 지푸라기 벽안에

길다란 책상 네 개

열 댓명 아이들이 고린내 나는

새우냄새 맡으며 모래 바닥 교실에서

영어를 배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