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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stimony

2014년 4월 고난주간 그리고 세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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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그들의 슬픔에 동참할 수 있으리요. 어찌 그들의 억울함을 풀어줄 수 있으리요. 그저 조금이나마 그들의 슬픔에 동참할 뿐이요. 그들의 억울한 심정을 십분의 일이라도 풀어 줄 수 있다면,

나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으로, 나 자신의 불충함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나에게 보여주신 대로, 그리고 내가 느낀 대로, 이 사월에 있었던 일에 대하여 적어 보고져 한다.

캄보디아 캄퐁솜 신학교가 방학을 하자마자 나는 한국으로 향하였다. 4월은 가장 무더운 달이고 또한, 캄보디아 신정휴일이 있는 달이기에 우리는 4월달에 3 주간 방학을 한다. 또 보통 사월에는 고난주간과 부활주일이 있기에 부활주일을 보내고 한국에 가서 쉬기도 한다. 올해는 연초부터 선교팀이 많이 들어오고 , 강의하는 분들도 오고, 계속해서 쉬지 않고 손님들이 왔고 또한, 여러 지방을 같이 다녔기 때문에 나도 지쳐 있었고, 피부도 많이 가렵고 이도 아프고해서 3월말 방학이 되자마자, 고난주간과 부활주일 예배를 렐리 (Reli) 교수에게 맡기고는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이제까지 기억으로는 부활절을 항상 캄보디아에서 지키고, 한국으로 방문을 했는데, 올해는 이상하게 부활절 전에라도 한국으로 가서 쉬고 싶었다. 오라는 사람도 없었고 그리 특별히 가서하고 와야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조용한데서 영·육간에 쉬고 싶었다. 이도 씹을 때마다 아프고, 먹는 것이 고역이다.

3월 30일 시하누크빌에서 프놈펜공항으로 가서 체크인을 하고 공항 면세점에 들어가니 많은 캄보디아 사람들이 취업을 하여 한국을 가려고 비행기를 기다리는 동안 이제 마지막으로 마중나온 부모 친지와 핸드폰으로 전화를 한다. 유리창을 보면서 우는 사람도 있고 표정들이 다 심각하다. 이제 가면 몇 년 있어야 만나게 되니 모두들 핸드폰을 하면서 또 유리창을 통하여 보이는 그 사랑하는 사람들의 얼굴들을 눈물을 글썽이며 쳐다보면서 하염없이 통화를 하고 있다. 그 장면들이 너무나 보기 애처로워 사진을 찍어두었다. 나중에 세월호사건이 나고 이 사진을 보고 나는 너무 깜짝 놀랐다. 공항 밖에서 그 많은 사람들이 지척지간이지만 들어가 볼 수 없는, 타국처럼 간주되는, 그 면세점에 있는 아이들을 유리창을 통해서만 얼굴을 희미하게 보고 손을 흔들며, 사랑한다고 말해주어도, 몸조심하고 잘 지내라고 고함을 질러도, 그 공항 유리창은 목소리를 하나도 안으로 들여보내지 않는다. 이 장면이 나중에... .

 


비행기를 타고 3 월 31 일 오전에 인천에 내렸다. 홍정철 목사님이 예약해놓으신 새중앙교회 선교관으로 갔다. 요사이는 이곳에서 여장을 풀고 쉬어가는 선교사들이 많아 예약이 잘되지 않는다. 숙식을 무료로 제공하고 교통도 서울과 가까워 일보기도 편하고 시설도 괜찮아 많은 선교사님들이 애용한다. 항상 올 때마다 이 교회에 대해 고마운 마음이다.


홍목사님과 점심식사를 같이 했다. 여러 차례 암수술을 받으시고 형편이 어려우신데도 올 때마다. 항상 신경을 많이 써주신다. 다음날 4월 1일 조영길 목사님을 만나러 갔다. 안양백화점에서 식사를 하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몇 년 전 캄보디아에 선교 오셔서 한국어를 가르치시다가 몸이 않 좋으셔서 한국에 돌아가 진찰을 받고 나중에 심장수술을 하시고 캄보디아에는 다시 오시지 못하고 한국에서 신학을 강의하신다.

잘 대접을 받고 쌍문동에 있는 로뎀교회로 갔다. 그곳에는 최재훈 목사님이 답일하신다. 2003년부터 3 년간 캄보디아에 오셔서 우리 선교관에 머물면서 같이 캄퐁솜 선교 사역을하셨다. 신학과 찬양을 가르치셨다. 찬양을 캄보디아어로도 번역해 가르치셨다. 매년 캄보디아로 단기 선교도 오고, 그간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학에 진학할 자매가 있어 동남아에서 대학 공부할 것을 권유했다. 그랬더니 캄보디아로 나오겠다고 했다. 또 한 형제는 다니는 회사를 그만두고 선교사로 나가겠다고 했다. 그래서 내가, “그러면 교인들 다 선교지로 나오고 목사님은 제일 나중에 나오면 되겠네요. 원래 선장은 제일 마지막에 나오는 법이니까요.” 라고 했더니 어떤 형제가 “목사님은 교인들 다 선교지로 보내고 혼자서 미국으로 가는것 아니야”라고 농담을 했다. 어쩌면 이 대화에서부터 세월호는 암시되었는지도 모른다. 천안함사태가 터지기 바로 전에도로뎀교회가 캄보디아로 선교여행을 왔다. 선교지를 다 돌아보고 사역을 열심히 하고 마지막 날은 섬으로 해수욕 하러갔다. 선교팀과 해수욕하러 섬까지 배타고 가는 일은 이제껏 없었고 이후에도없었다. 그러나 캄보디아에 있을 때 그 섬에 대한 추억이 너무 강하셨던지 그 섬을 한번 더 가고 싶어하셔서 배를 한 대 빌려 그 섬으로 가는 중간에 산호초가 아름다운 곳에 배를 세워놓고일부는 구명조끼를 입고 바다로 뛰어들고 일부는 배에 앉아 그 무리들이 신나게 노는 것을 바라보았다. 나는 배에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해상훈련을 하는것 같았다. 나중에 천안함에서도 일부는 바다속으로 나머지는 구조되는 것을 보고 바로이어 천안함사태가 났올때너무 비슷한 장면을 우리가 캄보디아에서 실행해 보았다는 것이 섬듯하게 느껴졌다.

또 천안함 몇 달 전 우리 대통령이 캄보디아를 방문했다. 아마 프놈펜과 시음리업을 방문하신듯하다. 앙코르 와트 사원에 차가 서더니 대통령이 내려서 그 사원 앞에서 분향하는 모습이나온다. '아니, 어떻게 저럴수가!' 순간적으로 나는 놀랬다. 몇 백명의 한국선교사들은 이곳에 와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하며 선교 활동을 하는데 국립묘지도 아니고 불교사원앞에서 분향을 할까? 그것은 국가 간의 의전에 속한 문제가 아니요. 믿는 성도로서는 우상숭배 행위이다. 그 일로 속이 상했다. 그리고 바로 일월 달인가 한국에 왔을 때. 국가 지도자가 우상숭배하는 것은 국가적인 재난을 불러 온다고 설교를 했다.

이 천안함사건이 앙코르사원 분향과 무관할 수있을까? 물론 나 자신도 보이지 않는 여러 가지를 우상시해서 섬기는 죄를 범하고 있다. 하나님은 우상숭배를 지극히 싫어하시고 회개하지 않으면 반드시 심판하신다. 믿는 우리도 우상숭배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지만 그것을 깨달았을 때는 즉시회개해야 한다. 이제 나도 신앙인이 되고 이제껏 살아온 인생을 되돌아 볼때 내 속의 우상으로 인한 고난' 이라는 이 원리는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진리임을 더욱 실감한다.

 


4월 2일 서울에서 대구로 내려가 장모님 댁에서 좀 쉬다가 4월 4일(金) 전남 광주로 갔다.이영환 목사님이 무등산 힐본수양관에 숙소를 정해주셨다. 무등산은 난생 처음으로 와본다. 좀 조용하고 휴식하기를 원했는데 딱 알맞은 장소였다. 열대에서 벌써 25년이나 적용된 몸이라 아침 저녁으로는 많이 쌀쌀했다. 그래도 이런 약간 추운 기후가 좋다. 열대에서는 경험해 볼 수 없는 이 환상적인 날씨를 내내 그리위하면서 살았다. 항상 후덥지근 하고 쌀쌀한 날씨라고는 일년에 2~3일 이나 있을까.

아침 먹기 전에 한번 산에 올라갔다 오고, 아침 먹고 또 한번 점심 먹고 또 한번 무등산 자락을 조금 올라갔다. 내려왔다. 이번 한국방문에서 특이한 것은 벚꽃이 너무 때 이르게 만발했다는것이다. 전국적으로 벚꽃이 만발해있었다. 서울에서도 벚꽃이 많이 폈고 대구로 내려오면서 보는 산야에도 어김없이 벚꽃이 흐늘어 졌고, 장모님, 처제와 같이 드라이브한 동화사 길에도 벚꽃이 장관을 이루고 대구에서 광주로 오는 길에도 또 이 무등산에도 벚꽃은 마음껏 피고 또 벌써 떨어지고 있었다. 너무나 때 이른 벚꽃의 만개 그리고 사월 초인데 떨어지기 시작하는 꽃잎들. 산을 올라가니 온통 돌들이었다. 참, 돌과 암반이 많았다. 여러 곳에서 기도소리가 들려왔고 나도 조금 편편한 돌 위에 올라가 좀 쉬면서 사색을 했다. 그런데 그 돌은 꼭 관같이 생긴 돌이었다. 하도 이상해서 사진을 찍어 놓았다. 그 돌 위를 왔다 갔다 하며, 내가 바라는 것들을 이야기하고 답답한 마음을 그냥, 주여! 주여! 라고만 외쳐 됐다. 다른 말은 잘 생각나지 않고 주님만 불렀다. 어떤 곳에는 목련이 거의 다 떨어져 나무 밑에 좀 안 좋은 모습을 하고 있다. 그 어여뿐 꽃이 떨어져 땅위에 있으니 시커멓게 되어 버리고 꽃의 형색이 말이 아니다. 참 예쁜 꽃인데, 이런 모양을 하고 있다니, 그 주위에 서서 한참을 보았다. 인생도 어찌보면 꽃과 같아서였을까.

 


4월 5일도 그곳에서 보내고 4 월 6 일에는 해남의 노상헌 목사님이 담임하시는 신방교회에서 설교를 했다. 이 목사님이 이 교회를 소개시켜주셨다.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바알선지자들과 대결을 벌이고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엘리야의 하나님이 참 하나님임이 증명되고 그로 인하여 바알 선지자들을 다 죽이고, 또 마침내 기다리던 비가 내리고 엘리야는 그 빗속을 달려 아합을 앞질러가고 이제야 기다리던 이스라엘의 영적부흥이 왔다고 기뻐할 때 이세벨이 죽이겠다고 하는 소리를 듣고는 이제껏 의지하던 하나님을 뒤로하고 겁에 잔뜩 질려 광야로 도망하고 결국은 호렙산 굴까지 도망와 있을 때 하나님이 큰 지진도 아니요 큰바람도 아니요 세미한 음성으로 ‘네가 여기서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느냐'하는 질문을 하신 뒤 하사엘을 기름 붓고, 예후를 기름 붓고, 엘리사를 기름 부으라는 명을 받고 다시금 새로운 사명을 감당하는 엘리야처럼 우리도 이제껏 한국교회가 자랑거리가 있지만, 현대 자본주의와, 물질주의 ,학력주의, 향락주의라는 이세벨 같은 우상 우두머리에게 겁에 질려 그 본분을 잊어버리고 큰 좌절감과 무능력 속에서 영적 전투를 포기하고 이제 자신의 마음의 굴속에 들어앉아 외형적으로는 크게 부흥되고 성장한 듯 하나 실제 속으로는 온갖 무능과 겁냄과 상처와 낙망가운데서 힘을 잃은 우리의 모습, 또한 한국 교회의 모습이 엘리야의 모습과 너무나 흡사하고, 같은 성정을 가진 것을 생각할 때 위로도 되긴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선한 싸움을 계속 싸우기를 원하시고 바알선지자 850명 정도 죽이는 것으로는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되지 아니하고, 하사엘을 통해서 우상숭배하는이스라엘 백성을 도륙하도록 허락하시며 그의 칼날을 피하는 자는 예후의 저인망에 걸려서 남김없이 진멸하실 것이며 그래도 그 칼을 피하는 자는 하나님이 직접 쓰시는 선지자 엘리사를 통해서 모든 우상숭배자를 끝까지 소멸시키시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나타내셨다. 그만큼 하나님은 우상숭배자를 싫어하신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보이는 우상, 보이지 않는 우상, 이러한 것에 목숨을 걸고, 인생의 전부를 희생하고, 온 시간과 힘을 쏟을때 하나님은 그냥 침묵하시는가, 그냥 방관하시는가? 더욱이 자녀된 자들이 그러한 것을 할 때 질투하지 아니하시는가? 그저 선하신 하나님 이시기만 하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이제까지 우리가 성취한 것에 만족할 것이 아니요, 설사 실족하고, 실수하고, 죄를 지었다고 하더라도 낙담할 것이 아니요. 이제는 그 어둑한 굴 속에서 나와서 이제부터 하나님이 맡겨주시는 더 큰 사명을 완성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가 아니겠는가. 이제는 우리의 연약함을 알았으니 항상 세미한 음성으로 말씀하시는 성령님의 목소리를 듣고 실행하는 것이 우리 앞에 놓여있는 거대한 장애물을 걷어내는 방법이 아니겠는가. 화려하고 눈에 보기에 장관을 이루는 거대한 지진이나 폭풍과 같은 세상의 힘이 아니라 오직 보잘것 없는 것처럼 보이는 그 성령님의 조그마하고 슬쩍 지나가는 듯이 이야기하시는 그 목소리를 놓치지 않고 붙들고, 그것을 마침내 실행해 내는 것이 하사엘이 하는것처럼 예후가 하는 것처럼 엘리사가 하는 것처럼 무진장한 사역이 될수 있다. 결국 그 날의 설교요점은 하나님은 우상숭배를 무척 싫어하시고 오늘 날도 모든 형태의 우상숭배를 싫어하시므로 성령의 소리에 민감하여 낙망하지 말고 다시 일어나서 우상의 힘을 이기고 하나님의 뜻을 마침내 완성하자는 것이다.

설교를 마치고 해남에서 완도로 가서 점심을 먹었다. 그곳에서 노 목사님은 이곳이 한국에서 바닷 물살이 제일 쎈 곳이라고 하셨다. 윤선도 생가를 돌아본 후 다시 무등산 헐몬수양관으로왔다. 수양관에 있는 동안 이형완 목사님과 사모님이 자주 찾아오셨다. 식사도 같이하고, 치과치료도 덕분에 잘 받았다. 오랜만에 대공사를 했다. 돕는 손길들에게 모두 감사할 뿐이다. 그렇게 성심성의 껏 베푸시니, 그래서 이 선교사역도 계속 할 수 있는 힘이 나는 것같다.

4월 7~8일은 계속 산으로 길이 난 곳으로 걸어 다니고 풍경을 보고 새소리를 듣고 계곡물흐르는 것보고, 꽃나무 구경하고 그렇게 캄보디아에 할 수 없는 것들을 마음껏 느껴보았다. 한국은 산이 참좋다. 산이 많은 것도 큰 축복이다. 물이 깨끗하고, 나무가 많고, 숨겨진 보화들이 산에는 많이 있다. 나도 등산을 참 좋아 했는데. 89 년도에 싸이판으로 이주하고 그 후 싱가폴로 캄보디아로 열대에서만 살면서 산에 갈 기회도 거의 없었다.

수요일 (4월 9일)에는 이형환 목사님이 담임하시는 광주계림교회에서 설교를 했다. 같은 본문말씀(왕상 19:9~11)으로 신방 교회에서와 같은 메시지를 전했다. 그리고 이제는 네번째 인을 뗄 때에 나오는(계시록 6장) 창백한 말이 출현한 것으로 믿어지기 때문에 많은 죽음이 그 말탄 자를 뒤따른다고 했다. 갑자기 어떤 돌발 상황이 벌어질지도 모르기 때문에, 촛불, 전등, 약간의 달러도 보관하고, 자녀 중 하나는 동남아로 진출시키는 것도 좋을 것이라고 했다.

 

4월 10일 광주에서 평택으로 가서 홍순호 목사님과 사모님 같이 식사를 하고 수양관에서 쉬고 4월 11일 새에덴교회 청년부 담당이신 홍윤기 목사님을 만나 올 8월에 방문 예정인 선교팀 일정을 논의하고 4월 12일 토요일 대구 서일교회의 김동욱 목사님을 만났다. 일전에 캄보디아로 선교정탐을 오셨고 우리 KBS 신학교에서도 가르치셨다. 4월 13일 주일에는 서일교회에서 같은 본문 왕상 19:9-11의 말씀으로, 같은 주제로 우상숭배, 오늘 날은 무엇이 우상 숭배인가의 말씀을 전했다.
예배 후 목사님과 잠깐 이야기 하면서 주중에 무엇을 하는지 물으셨다. 그냥 장모님 집에 있을 것이라고 했더니 '노아'라는 영화를 보러 가지 않겠냐고 하셨다. 이제껏 선교사가 되고나서 영화를 보러가자고 하신 목사님은 김 목사님이 처음인 것 같다. 나 자신도 영화에는 근 관심이 없고 또, 바쁘게 돌아다니다가 다시 캄보디아로 돌아가는 것이 보통이었다. '노아' 라는 영화에 관심이 갔다. 먼저 방주가 생각이 나고 어떻게 그 내용들을 담았는지기 몹시 궁금했다. 목사님은 벌써 보셨다고 했다. 그래서 장모님한테 물어보니 장모님도 보셨다고 했다. 혼자 보러가기 뭐해서 기회가 되면 보리라하고 하루 이틀 미루었다.

4월 14일도 일을 보느라 바쁘게 지냈다. 4월 15일 그 날은 세월호사건이 일어 나기 하루 전이다. 그리고 고난주간 중 이었다. 갑자기 두통이 시작되었다. 저녁이 되고 밤이 되니 더 더욱 참을 수 없었다. 밤 중에 장모님이 나가서 아스피린을 사오셨다. 간신히 잠을 잤다.
그리고 4 월 16 일 그 세월호사건이 TV 에 계속 방송되기 시작했다. 사건은 갑자기 돌변했고 300 여명이 희생된 것으로 보도했다. 이 고난주간에 어떻게 이런 일이. 4월 17일도 온통 그 방송이었다. 4월 18일 금요일,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그 날 조금이나마 남아있던 부분도 바다에서 사라졌다. 희망은 점점 캄캄해졌다.
이 고난주간에 일어난 이 일은 분명 우리에게 무슨 메시지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왜 이 고난주간에 내가 한국에 들어오게 되었는지. 이제껏 17 년동안 선교 생활하면서 부활절을 캄보디아에서 보내고 한국에 들어와 선교보고도 하고 쉬고 했는데. 그리고 왜 그 로뎀교회에서 이야기 도중, 선장은 제일 나중에 나와야 된다는 이야기를 하게 됐는지. 그리고 새중앙 교회에 어렵게 열흘정도 방을 잡아 놓으셨는데  왜 나는 갑자기 대구를 거쳐 광주 무등산 수양관으로 가서, 그 관처럼 생긴 바위에서 묵상을 하고, 푸른 소나무사이의 목련이 그렇게 가없이 져버린 모습들을 봐야 했는지. 그리고, 그 남해안 땅끝 해남에서 또 완도까지 가게되서 그 노목사님으로부터 “이곳은 한국에서 물살이 제일 쎈 곳입니다.”라는 말을 듣게 됐는지, 그리고, 선교보고 나왔다가 '노아' 영화를 보러가자는 제의를 받았는지. (실제로 그 세월호는 노아방주와 거의 비슷한 크기였다.) 그리고 왜 그 세월호사건 하루 전날부터 나에게 편두통이 시작되었는지? 우연의 일치라고는 할 수 없는 일들이었다. 그리고 프놈펜공항에서의 그 부모 친지들과 자녀들의 작별하는 장면은...

그리고 세월호사건 이전 이미 세 교회에서 동일한 본문 말씀 (왕상 19장)으로 우상 숭배에 대해 설교를 하고 있던 참이었다. 이제 고난주간에 발생한 이 참사를 어떻게 해석하여야 하는가?

두통은 토요일 (4 월 19일)까지 계속 되었고, 두통 기간 내내 또 고통스러운 세월호 참사를 생생한 현대의 노아의 방주를 TV 를 통해 세뇌되도록 뉴스를 봤다. 노아영화는 벌써 종료 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생한 현대의 노아의 방주를 TV 를 통해서 며칠에 걸쳐 계속 보여 주셨다. 이 세월호의 모습이 바로 오늘날 방주, 즉 우리 한국 교회의 모습이구나. 그 옛날 노아 8 가족만 구원하시고,  그 모든 애통과 울부짓음 속에도 침묵하시고 문을 닫아버리시고, 세상을 심판하신 하나님. 오늘날 현대 교회의 모습이 어떠한지 특별히 한민족에게 큰 고통 속에서 생생하게 드러내셨다.

4월 20일은 부활주일이었다. 부활주일은 언제나 담임목사님이 설교를 하시는데 풍경있는 교회의 정 목사님은 나에게 오전예배 설교를 맡기셨다. 같은 본문 말씀(왕상 19 장)을 전하고 세월호에 관해 이야기했다. 이 고난주간에 발생한 이것은 하나님께서 한국교회에 대한 긴급한 메세지임을 이야기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첫째로, 맨 마지막으로 배를 떠나야 하는 선장과 책임자들이 배를 버리고 나온 것은, 벌써 십자가 사건이 있었던 예수님 당시에도 그 구원의 방주인 십자가의 도를 제일 잘 알았었어야 할 바리세인, 서기관, 장로들이 끝까지 그 십자가를 지키고 그 자리에서 목숨을 바쳐야 함에도 불구하고 제일 먼저 십자가를 떠나고, 십자가를 배반하고, 그 구원의 도를 버린 것같이 오늘날도 교회의 지도자, 선교자들도 평안할 때는 온갖 영광 받으며 행세하다가 고난이 찾아오면 제일 먼저 배반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이것을 우리 지도자들은 인정하기 싫지만 이번 사건을 통해서 분명히 드러내셨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두렵고 떨리는 일입니다. 나 자신도 선교 현장에서 핍박이 오면 목숨을 구하려고, 도망가는 모습을 상상해 보고는 식은 땀이 납니다. 먼저 우리 영적 지도자들이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 지도자들은 영적인 힘을 잃은 지 오래 됐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예배를 최우선으로 생각해야 하는 목회자, 장로들은 여로보암 때와 같이 자신들만을 위한 예배의 길로 그 방향을 바꾸어 버렸습니다. 예루살렘으로 예배하러 가는 사람들에게 그리로 가지 못하게 하고 베델과 단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여기도 하나님이 있으니 여기서 예배해도 괞찬다라고 속인 여로보암과 그 후대의 그를 쫓는 모든 이스라엘 왕들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습니다. 지금 동네마다 넘처나는 교회들은 과연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인지 아니면 교회를 새로이 개척해야 하는 사사로운 욕망에서 비롯되었는지, 그리하여 교회간에 따뜻한 성령안에서의 교제는 사라지고, 다른 교회와는 냉냉함이 흐르고 심지어 경쟁하여 위화감이 조성되고 있는 개신교의 현실에는 교회 지도자의 책임이 큽니다. 우리는 말하기를 카톨릭은 마리아를 우상으로 섬기고, 교황을 우상처럼 섬긴다고 비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개신교가 과연 하나님을 예배하는 교회인지 개교회나 교단을 우상처럼 섬기는 종교단체가 아닌지 회개해야 합니다. 개신교 교회간에, 이단을 제외한 개신교 교단간에, 성도들간의 교통이 막힌 것이 주로 교회 지도자로 인하여 그리된 경우가 허다합니다. 지금은 평온한 때라 그 취약점이 잘 드러나지 않지만 위기상황이 벌어지면 이 세월호 선장보다 더 부끄러운 일이 많은 교회에서 일어날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많은 삯군은 미련 없이 교회를 떠나고 십자가를 버릴 것입니다. 

 

 

둘째로, 안타깝게도 학생들은 너무나 순진하게 그 지시에 무조건 복종하였다. 아무런 비판의식 없이 맹목적인 교회생활, 성경말씀과 성령의 감동에 기초해서 성도 개인이 독자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무조건 순종하는 것을 미덕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기독교 신앙은 교회단체로 구원이 되는 것이 아니요. 각자 개인 개인의 믿음과 행위에 따라 구원을 얻느냐 못 얻느냐 결정된다. 비둘기처럼 순결함이 기독교인의 하나의 큰 축이라고 한다면 뱀처럼 지혜로운 것은 다른 축을 이루어야 한다. 양은 지혜롭지 못하고 침착하지 못해서 갑자기 놀라면 제자리에서 어쩔 줄을 모르고 계속 폴짝 폴짝 뛴다고 한다. 우리 크리스천은 양 같아서 위기대응 능력이 매우 부족하다. 그래서 양 같은 기독교인은 잘 속고, 엉성한 교리에 유혹. 낭패를 당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뱀은 어떤 긴급상황에도 당황하지 않는다. 냉철히 판단하고 행동한다. 우리는 이러한 냉철한 비판력, 철저한 검증, 합리적인 사고, 균형 잡힌 신앙 생활이 부족하다. 모든 것을 은혜로 덮는다. 그냥 교회에 덕이 안된다는 이상한 말을 해댄다. 오직 믿음이 만사 형통이요 만병 통치인 심히 불균형의 잘못된 신앙생활을 해왔다. 교회 내에서도 팽배하다. 사회 풍조나 유행에 쉽게 휩싸이는 국민성이 교회 내에서도 팽배하다. 진리에 기초를 두고 합리적으로 이성적으로 판단하기 보다는 감정적인 요인이나. 대세에 휩쓸리는 신앙 생활을 많이 하고 있다. 큰 성전 짓는 것이 대세이면 그것을 따라가고, 어떤 Program 이 좋다고 하면 그것을 따라가고, 성경에서 강조하고 있지 않은데도 목사님들은 그 쪽 방향으로 계속 밀어부치고 성도는 아무런 비판의식 없이 그냥 복만 많이 받으면 되지 하는 이기적인 생각에서 이러한 형태의 교회를 공동으로 만들어왔다.

셋째로 구명조끼를 입고 있다고 해서 목숨이 보장 되는 것이 아니었다. 우리 개신교는 믿음(구명조끼)를 너무 강조해왔다. 오직 믿음으로!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그러나 이것은 16 세기 종교개혁이 일어나면서, 가톨릭의 부패에 항거하고, 행위에 의한 구원을 반박하기 위해 믿음이 강조된 것이다. 성경은 믿음과 그에 따른 행위를 다 같이 구원을 얻기 위한 필수불가결한 요건으로 간주한다.

강단에서 너무 오랫동안 이 교리(믿음에 의한 구원)는 강조되어 왔고 그로 인해 행위는 소흘히 여겨지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크리스챤의 생활이 지탄받는 수준으로 전락하게 된 이유이고, 교회 내에서 자신들만 잘되면 된다는 기복주의 신앙 번영주의신학이 팽배하게 되고, 이기주의적인 교인들을 양산하게 되었다.

믿음에 따른 행위는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믿음이 있으면 성결한 삶이 있어야하고, 믿음이 있으면 희생적이고 이타적인 삶이 있어야하고, 믿음이 있으면 전도, 구제, 봉사가 있어야하고, 믿음이 있으면 이웃사람들이 인정하는 모습들이 나타나야한다. 그것이 믿음의 의미요, 믿음이 본질적으로 추구하는 바이다. 그러나 이제까지 한국 교회는 교인을 자기교리의 믿음속에 가두어 놓고, 성령이 원하는 행위를 하도록 권면하기 보다는 개교회가 원하는 행위를 하도록 오인하여 온점이 많다. 믿음(구명조끼)이 있으면 세상이라는 험난한 바다에 뛰어들어 그 믿음에 자신을 세상의 유혹과 죄로부터 구하고 다른 사람을 구할 수 있는지 실행해 보아야 한다. 구명조끼가 바다 위에서 비로서 위력을 발휘하듯, 우리의 믿음도 세상 속에서 비로서 작동하고 치료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죽어가는 자를 구하여 내고, 그 존재가 중명되는 것이다. 이것은 자신의 믿음이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길이요 믿음을 강하게 하는 훈련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한국 교회는 그저 개교회 내에서만 그 믿음(구명조끼)를 자랑하고, 거기에 안주하고, 거기에 목숨을 거는 신앙생활을 해왔다. 그리하여 믿음은 활동할 기회를 잃어버렸고 점점 시들고 죽어갔다. 우리는 분명히 보았다. 그러한 신앙생활은 환란 날에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넷째로 배가 구조변경을 하고, 짐을 과적하고 평형수를 줄이고 눈가림으로 해서 출항허가를 받았다고 한다. 세월호는 우리 자신의 몸일 수도 있고 교회라고도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사람을 그의 영광을 위해서 그의 형상대로 창조 하셨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들의 몸을 그분에 목적대로 사용하지 않고 무엇인가를 더욱 더 첨가해야지만 축복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교육도 더 받아야 하고, 재산도 더 모아야 하고 집도 더 크고, 많이 가져야하고, 더욱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야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이요. 자신에게 부어지는 축복으로 착각하면서 살아가게 된다. 마치 이윤을 최대화하기 위해 콘테이너를 실을 수 있는데 까지 싣는 것처럼, 구조변경을 해가면서 사람을 더 태우려고 하는 것처럼, 그러면서 생명수와 같은 평형수를 확 줄여버렸다. 우리 생활에 꼭 필요한 양심, 도덕, 정직, 사회적 책임, 인내심, 준법정신, 이러한 것들은 확 빼 내어버리고 자기의 욕심과 재물을 그 자리에 채워 넣기 시작했다.

교회도 서로 위하고 서로 사랑하는 마음, 남을 나보다 낫게 생각하는 마음, 손해 보더라도 주님 이름에 누를 끼치지 않는 생활, 이러한 성령이 주시는 마음은 다 빼버리고 오로지 우리교회의 부흥, 내 가족의 축복, 힘있는 교회, 능력 있는 목회자, 번영하는 성도, 이러한 곳으로 열심 들을 쌓아나갔다. 고난 받고, 겸손한 사람들은 싫어 버림을 당하는 시대,

 

평형수를 빼고 과적한 배가 급한 물살을 만나는 곳에서 방향을 튼다는 것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오는 가를 우리는 똑똑히 보았다. 그 무게(학력, 재물, 명예)가 좀 덜하였더라도 안전할 수 있었는데, 그 평형수만(도덕, 책임, 양심)좀 더 있었어도 그런 재난을 당하지 않았을 텐데, 우리는 어쩌면 다가올 환란에 화를 더 쌓아가는 교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교회의 존재 목적이 영혼 구원인데 오히려 맷돌을 달아 바닷속 심연으로 빠뜨리는 패역한 역활을 하고 있지 않은지 심히 두려워해야 한다.

 


다섯번째로 사태는 너무 긴박하게 돌아갔다는 것이다. 제대로 손을 써 볼 시간이 너무 짧았고 그 시간 마저 허둥대며 놓쳐버렸다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도 시간이 다하여 가는 시대이고 끝으로 향해 달음질쳐 가는 시대이다. 1999 년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으로 세상은 좀 긴장하는 듯 하더니 별 일 없이 지나가니 안심하고, 2012 년 마야의 달력으로 또 긴장하더니 또 그냥 넘어가니 사람들은 이제 긴장을 풀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의 예언이 아니다. 성경은 지금 종말을 향해 성큼성큼 이 세월이 걸어가고 있음을 가르친다. 이제 바야흐로 긴장하며 적극적으로 대비하여야 할 시간인데. 이러한 엉뚱한 예언들 때문에 오히려 더 정신이 느슨하게 되었다.


세월호는 분명히 보여주었다. 일단 상황이 벌어지면, 즉 환란이 시작되면, 도망갈 시간이 거의 없다는 것과 준비되지 않은 자가 그 사탄의 세력에서 도망쳐 나온다는 것은 불가능 하다는 것을... 지금은 너무나 시간이 없는데 사람들은 아직 태평이다. 배가 기울었는데도, 전혀 긴박감을 느끼기 못한다. 이제껏 그래왔던 것처럼 어떻게 되겠지. 그렇게만 생각한다. 일상의 생활이 너무나 중요하고, 먹고 사는 일이 너무나 중요하고, 자녀 교육이 너무나 중요하고, 재산증식이 너무나 중요하다. 기울어 가고 있는 배 안에서 과연 그러한 것들이 중요한가, 시간이 없습니다. 탈출하십시오. 어서 이 세상의 죄와 사슬에서 탈출하십시오. 항상 우선 시 해왔던 세상적인 가치관에서 어시 탈출하십시오. 안일한 믿음과 혼합주의 신앙에서 어서 서나오십시오 정말 시간이 없습니다.

이러한 내용으로 풍경있는교회에서 설교하고, 오후에는 대구스타디움에서 열리는 부활절연합예배에 참석하고 저녁에는 충성교회에서 동일한 내용을 전하였다. 4 월 22 일 다시 캄보디아로 돌아왔다.

6 월초 흰돌교회 이상범 목사님께 사역일로 전화 드렸다. 이 목사님은 내가 한국에 왔을 때 못 만나서 미안하다고 하셨다. 그 이유는 세월호 침몰로 친구 목사님 네 분이 네 명의 자녀를 잃어서 진도에도 두 번 갔다 오고 그 일로 너무 바빴다고 하셨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 세월호 사건은, 고난주간 발생한 이 일은 단순한 사고가 아니고 우리 한국 교회에 전하는 하나님의 메시지라고 생각이 들어 이 글을 적게 되었다.

누구의 잘못인가, 한국교회가, 지도자들인가, 성도들인가, 모두의 잘못이다. 우리는 우상숭배에 너무 오래 깊이 빠져 있었다. 엘리야 시대 때 이스라엘 사람들도 여호와 하나님과 바알신을 같이 믿었기 때문에 엘리야 선지자는 언제까지 여호와 하나님과 바알 사이를 왔다 갔다 하려느냐 라고, 여호와가 하나님이면 여호와께로 바알이 하나님이면 바알에게로, 하나를 선택하라고 했다.

오늘날 우리가 속고 있는 것이 바로 이점이다. 우리는 분명히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교회에 출석하고 예배드리고 모든 일을 한다. 그런데 그 교회 안에 실제로는 예수그리스도 보다 더 강력히 영향을 미치는 현대판 바알들이 많이 자리 잡고 있고, 성도들은 부지불식 간에 그것을 따라가는 신앙생황을 하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우상숭배이다. 이렇게 현대판 바알과 예수그리스도가 합성된 새로운 종교하에서 자신의 모든 욕망과 가증한 행위를 자연스럽게 탐닉하면서도 자신은 선조들이 지켜온 믿음의 길을 가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다.

1970년대 이후 갑자기 불어 닥친 경제 개발과 물질주의 사상은 온 국민을 그쪽 방향으로 드라이브 하였고, 기술과 학력, 출세 등이 사회의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자리 잡게 되고, 교회도 그러한 사회적 요구에 부흥하지 못하면 외적 성장을 가져올 수 없다고 섣불리 판단하고, 그 방향으로 매진하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탐욕스러운 교회들은 이세벨의 역할을 감당하며 참선지자들을 도퇴시켜 나갔고, 이기적인 성도들은 얼른 세상적인 가치관을 교회 안으로 도입해 정착시켜나갔다. 이러한 성도들의 욕심을 만족 시켜주지 못하면 무능한 목회자로 전락하기에 신학을 마친 목회자들도 그러한 유행에 동조하며 한국 교회를 이러한 우상이 교회내에 공존하는 형태로 만들어왔다.  이것이 30~40년을 그저 안일하게 신앙생활 해온 기성세대의 문제점이요, 적폐이다.

 

세례를 받은 사람이 사찰에 가서 분향을 하고 합장을 하고, 또 교회 기도회에 참석하고, 하는 것이 하나님을 예배해하는 것인가 아니면 우상숭배인가? 분명 둘 중에 하나일 것이다. 교회연합이란 이름으로, 평화라는 이름으로 큰 교회 지도자들이 혹은 예수님을 믿는 국가 지도자가 여호와 하나님과 바알 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 또한 예배와 기도가 주가 되어야 하는 구별된 예배당에서 비즈니스가 공공연히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어떠한가, 재력이 있는 사람이나

전문 지식자들이 여러 덕목들이 결여되어 있음에도 먼저 장로의 직분을 받고 있는 현실은, 은밀한 죄를 회개하지 않으면서 교회 활동은 열심히, 강심장으로 밀어부치는 사람들은, 사명이 아니라 괜찮은 직업으로 생각하고 신학교를 가거나 목회를 하고 선교사로 나오지는 않는가, 다른 것은 다 포기해도 자녀 교육만은 모든 것을 다 희생해서라도, 이렇게 우리 주변에는 벌써 많은 바알들이 소리 없이 교회 내에 견고히 자리 잡고 있어왔다. 내 자신에서부터, 내 가정에서부터 우상 숭배는 진행되고 있다. 의인이 너무나 희박해서 찾을 수 없었던 아브라함 시대처럼 의인은 보이지 않고 성경책을 든 교인과 십자가를 높이 단 교회만 넘쳐나고, 바로 우리 현재의 모습이 아닌가.


세월호는 정말 가슴 아픈 민족의 슬픔이다. 그러나 이 원인을 바로 알고 회개지 않으면 더 큰 애통과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 이 어린 아이들의 원통한 회생 위에서도 우리는 또 어제와 같은 회색의 바쁜 신앙의 길을 갈 것인가